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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랑보다 강한 것

by merlyn 2013. 3. 22.



결혼하기 얼마 전,
석양이 불타는 친정 마당에 앉아 처녀 시절 받았던 수많은 편지를  불태웠다.
평소 낙엽 태우는 용도로 쓰였던 찌그러진 페인트통에 편지를 차례차례 한 뭉치씩 넣고 있는 꼴을 보신
친정엄마는 "애쓴다. 과거사 지우느라~~" 하고 혀를 끌끌 차셨다.
그때 그 착잡했던 나의 심정을 엄마는 절대 절대 모르셨으리라.
 
아버지가 병원 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그리고 이년 후 돌아가시고는 더더욱, 
엄마랑 내가 마주하는 시간이 아주 많아졌다.
평소에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아니 너무 버거운 당신이'었던 엄마가 혼자 살게 되니
한 아파트 뒷동에 사는 내가 신경써야 할 몫이 커졌고 그래서 그만큼
서로 적응하지 못해 삐그덕거리는 일이 하루하루 늘어만 갔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건 아버지에 대한 추억.
 
아내로서의 원망과 섭섭함, 갑자기 떠안게 된 상실감은 기억을 왜곡시키고
앞뒤를 통편집해내어 당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극대화시켜
엄마의 과거 결혼생활 전체를 도탄에 빠뜨리는 일을 되풀이하셨다.
그리고 그 넋두리는 고스란히 내 몫이 되어
엄마의 아픔을 나눠갖는 '친구같은 딸'이 못되어 준다고 날 비난하면
난 아버지에 대한 말 안되는 소린 더 이상 못 들어준다하고 맞받아 싸우는 시간이 되풀이 되었다.
아버진 내게 그렇게 어긋난 기억으로 (혼자 남은 엄마를 위한 억지 흉내로라도)  남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온 가족이 넌더리를 내고도 남아 넉다운이 될 즈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엄마네 아랫집 천장에서 물이 샌다고 해 엄마랑 같이 그 집으로 갔었다.
엄마보다 열 살 정도 아래의 부부가 사는 집은 기본 가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방금 이사나간 것 처럼 휑하고 꺠끗했다.
궁금해하는 엄마에게 '나이가 자꾸 드니 정리를 해야겠다 싶어서요' 라고 답하는 아주머니를 처음엔 이상타 하던 엄마는 점점 당신의 '짐'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드디어 상자가 열린 것이다.
편지를 불태우던 내 심정을 엄마는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했던 바로 그 이유.
엄마의 편지 상자.
엄마는 시집오면서 편지를 태우는 대신 몽땅 싸 안고 왔음은 물론 그 후로도 아버지랑 줄기차게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성공한 연애를 한 엄마의 의기양양한 일갈이었던 거다. 혀를 끌끌 차신 것이)
외항선 타고 유럽으로 미국으로 일본으로 다니시던 아버지께 받으신 편지와 그만큼 분량의 엄마 답장으로 가득찬 두어 통의 커다란 상자는 엄마가 정리해야 할 '짐'의 첫번째 대상이 되면서 세상의 빛을 다시 받게 되었고 그렇게 왜곡된 기억을 바로 잡아줄 증거가 되어버렸다.
 
난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빠의 편지엔 결혼했지만 혼자 남아 집을 지키는 엄마에 대한 끝도 없는 아빠의 걱정과 애정이 넘쳤고 4년 만에야 얻은 나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고 이제서야 엄마는 얘길하신다.
편지마다 혼자 힘들어 어떻하냐, 밥은 제대로 먹고 있나, 여기 나와서도 항상 당신 생각 뿐이다.
그리고 우리 멀린은 얼마나 컸을까, 지난 번 봤을 때 이런 저런 얘쁜 짓을 했는데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등등 
집에 대한 그리움, 가족을 떠나 있는 외로움, 미안함, 걱정, 딸래미가 자라는 걸 옆에서 같이 못 보는 아쉬움 그 모든 것이
아빠의 편지마다 역사가 되어 쟁겨져 있었고 그 한통 한통이 엄마의 어그러진 마음을 다림질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끝도 없이 계속 될 것 같던 원망의 넋두리는 점차 줄어들고 매일 읽으신 편지 내용을 내게 알려주시며 몇 달 내내 엄마는 새색시로 돌아간 마냥 행복해하고 계신다.
 
언젠가 "네 엄마는 강해보여도 속이 한량없이 여린 사람이다. 그러니 나중에 내가 없을 때 절대 혼자두면 안된다"하고 나즈막히 일러주신 아버지 말씀 때문에 난 어처구니 없는 넋두리를 하는 엄마를 미워하다가도 마음을 고쳐 먹고 또 미워하고~ 그러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신거야 하고 아버지를 원망하기를 되풀이 했었는데 결국은 아버지의 절은 시절 사랑으로 평생 내게 버거웠던 엄마를 조금이나마 껴안울 수 있게 되었다.
 
아~~ 결국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구나~~가 아니고 '증거'다.
사랑에도 증거가 없음 시간에 좀이 먹혀 흐릿해지고 지워져버린다. ㅎㅎㅎ
 
그나저나 내가 큰 일이네. 남편에게 편지는 커녕 종이 귀퉁이 쪽지 하나 제대로 받은 게 없어
결혼 20주년 되던 날 뭘 해줄까 묻던 남편에게 "편지 한 장 제대로 써주"했더니 벌레 씹은 얼굴을 했던 남자.
이 남자랑 난 뭘 우려먹으며 살 수 있을까.
 
P.S
"네 아빠는 어쩌면 그리 현명했나 몰라, 너 아장아장 걷던 거 보고 나가셨으면서 편지에 멀린은 때리거나 소리질러 키우면 안된다고, 넌 그러면 더 엇나가니까 잘 타이르면서 가르치라고 썼더라. 어린 너 잠깐 보고 어찌 그런 걸 알았을까? 난 지금껏 몰랐는데"
이런, 엄마! 그거 내가 맨날 하던 말이잖아! 나더러 억지로 뭐 하라고 강요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빠 편지 보고서야 알았다니 아이구 내가 못살아~~~
 



  오후에 2013/03/25 09:02
  "애쓴다 과거사 지우느라...."에서 빵~~터졌고
"나이가 자꾸 드니 정리를 해야겠다 싶어서요"에서 우리집 한 번 돌아봤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짐이 자꾸 늘고 집이 필요없이 크다는 생각이 들던차였는데...

위대한 건 사랑이 아니라 증거라는 말에 공감, 통감, 상감하는 바이옵니다....

감기는 나으셨습니까???
 
  merlin 2013/03/25 21:38
  뭔 감기가 턱이 아픈 지 밤새 참다참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진통제를 먹으려는데 속이 비면 아플까봐
바나나 한개 먼저 먹고.ㅋㅋㅋ
깜깜한 방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우그적우그적~~ 먹다가 킥킥 웃었답니다.
이제 많이 나았어요.

친정엄마가 시니컬하세요.
제대로 된 한 방 날리는데는 도사시랍니다.

시퍼런 청춘이시면서 뭔 그런 말씀을~~
짐정리를 생각하시기엔 아직 떄가 아닌 줄 아뢰오!
위대한 사랑의 증거도 든든히 지니셨을테고 얼마나 좋으실까^^  
  바다와섬 2013/03/25 20:56
  태워야 할만큼 절절했던 연애편지들이 있었다는 자체로도 넘넘 부럽습니다~~~
사랑에도 증거가 필요하다는거 정말 맞아요. 기억은 너무나 쉽게 변질되기에 ㅎㅎ  
  merlin 2013/03/25 21:25
  열 두어 가마니 정도 됐었다는~~~ 본 사람이 없으니 믿거나 말거나 막 뻥튀기 하지요, 뭐.ㅋㅋㅋ

섬님이시야 말로 절절하면서도 성공하신 연애를 하신 거잖아요.
증거도 탄탄히 지니고 계실테니 제가 넘넘 부럽습니다.
전 아무것도 없어요. 신혼 때 남편한테 편지썼다가 혼났어요.
창피하게 그런 거 회사로 보냈다고 ㅠ.ㅠ 불쌍하지요? ㅠ.ㅠ
 
  queen314 2013/03/25 23:09
  우리 선배님 어지간한 로맨티스트가 아니셨던가 봐요.
참 멀린님은 복도 많으셔라.....  
  merlin 2013/03/27 00:12
  누구나 그 시절엔 로맨틱하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은 죄 손에 전화기 들고 조금의 상상력도 필요치 않은 세상에 살고 있으니 삭막해요.
복이 많지만 이제야 깨닫고 후회하는 걸요. 바보지요.  
  나리타산 2013/03/29 01:25
  편지를 태우셨다고 쓰셨는데 전, 읽으면서 왠지 낙엽 태우는
냄새가 나는듯 했어요.깊어가는 어느 가을날 인듯도 하구요. ㅎ

런던에서 이년동안 매일 항공우편을 토쿄로 날려 주던 남자는
먼 생각으로 매일 매일 편지를 써서 우편함에 넣었을까나~~
매일 도착하는 에어메일이 기뻤다는 기억보다는 ,,,
매일 답장 쓰는 일이 마치 숙제 같았다고 솔직히 말 못했네요.
아직까지 한집에 살고 있는 그 끈질긴 남자, 냄푠 얘기입니당 ^^  
  merlin 2013/03/29 21:58
  아~~~~~~~~~
정말 정말 좋으셨겠어요. 진짜로 부럽습니다.ㅠ.ㅠ
그렇게 매일 그것도 이역만리에서 편지를 보내주셨다니~~
정말 로맨틱한 분이셨네요.
물론 매일 차곡차곡 편지가 쌓이면 정성스런 답장을 써야하는 부담감도 쪼끔 있으셨겠지만 ㅎㅎ
상상만 해도 제 가슴이 두근두근하네요.
전 그저 삑싸리, 어긋나는 짓만 하다가 편지 한 장 못 나눈 남자랑 덜렁 결혼해놓고
흰머리 나고서야 겨우 한 장 받았는데 그야말로 받으나마나한 내용이더라는 슬픈 사연만 있답니다.ㅠ.ㅠ

사실 저 글 쓰면서 저도 그때 낙엽태우는 냄새며 그 쓸쓸했던 마음이며 마구 실감났었답니다.
이 한심한 뇨자야~~~ 하면서요.ㅎㅎㅎ  


  호주돌팔이 2013/04/02 09:57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어야죠...
그게 되는 사람도 있고 안 되는 사람도 있는거죠.
다 똑같은 세상임 뭔 제미랍니까?  
  merlin 2013/04/04 00:58
  어딘가 댓글에도 썼지요.
느닷없이 써본 적도 없는 편지 써달래는 마누라 땜에 남편도 속이 터질거라구요.
차라리 옷이나 가방을 사달랠 일이지 말입니다.  
  디페쉬모드 2013/04/05 20:53
  편지라....궁쳐둔 편지들 다시 한번 보는데,재미있네요.
지방으로 이사간 친했던 친구와의 편지,숱한 연애편지......생일날 받은 카드에 참 모아놓은것도 많습니다.
이들 지금은 다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요?
그저 행복하기만 바랄뿐입니다.  
  merlin 2013/04/26 11:25
  가끔 궁금해지기도 해요.
대체 어떤 내용들이 있었을까? 이젠 기억도 안나는데~~
그냥 갖고 있었더라면 그것도 괜찮았겠다 싶기도 하구요.
ㅎㅎ  
  황새울 2013/04/22 00:47
  정말이지 쬐금 눈시울이 따뜻해졌답니다. 시골로 이사와서 화목보일러에 밑불용 종이를 넣다가 발견한 아버지의 일기장, 펼쳐보면서 왠지 불쏘시개로 써야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억이라는 게 참 소중한데 기억은 한계성을 가지고 그 한계성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역시 옛날 방식이 제일인거 같더라구요.  
  merlin 2013/04/26 11:30
  음~~ 아버님 일기.
저도 옛날 방식이 최고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 나오고 호기심 삼아 써서 저장했던 일기는 다 어디로 가버렸는 지 몰라요.
첨엔 플로피에 그 담건 작은 네모난 디스켓에~~
찾는다 해도 읽어볼 수도 없잖아요. 허망해 ㅠ.ㅠ

아버님 속내를 보셨겠네요. 괜히 저도 마음이 찡~~~합니다.^^
오랜만에 뵈요. 잘 지내시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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