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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새 책장

by merlyn 2012. 12. 4.



인터폰이 울렸다.
엊그제 마당에 내어다 놓은 책장을 수거하러 차가 왔으니 수거비를 가지고 내려오라고 수위아저씨가 알려주신다.
지갑을 가지고 내려가 돈을 치뤘는데 바로 돌아서지지가 않았다.
됐으니 가시라고 기사 아저씨가 한마디 하는데도 머뭇머뭇~~
그 순간 뻥! 하는 소리와 함께 아저씨의 걷어차기 한 방에 내 낡은 책장 뒷판이 날라가버렸다.
윽~~~ 내 가슴 한 가운데가 차인 것 같다. ㅠ.ㅠ
집으로 향하면서 자꾸 뒤돌아보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고맙다, 이십 칠년 동안 잘 썼다. 이리 보내고 싶진 않았는데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
 
난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왜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원래 그렇게 생겨서 그렇다 라고 밖엔 별 이유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유전자 탓이겠지.
살림을 잘 해 열심히 닦아주고 아껴가며 써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필요해서 사다가 그냥 쓰다보면 세월은 슬슬 지나가 버리고
새로운 스타일이나 기능이 추가된 새 상품이 나와도 별 관심이 없으니
고장나 못 쓰게 되버리지 않으면 금방 10년, 20년 된 물건이 되어 버린다.
그러고 보면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잘 사지 못하는 것 같다.
 
남편도 똑같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내 아들 녀석도 똑같으니
우리집 방방을 둘러보면 좀 우중충하다.
삼십년된 서랍장을 위시하여 대부분 이십년은 족히 넘긴 가구에 가전제품~~
가방도, 옷도 마음에 드는 거 사면 못 쓰게 될 때까진 그냥 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
친한 친구에겐 심심찮게 잔소리를 듣고 있고
몇몇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가끔은 충격이 되는 소릴 듣기도 했다.
왜 그러고 사냐고.
그래서 한동안은 그 잔소리에 부응하고자 가장 많이 잔소리를 들었던 가방이라도 하나 사볼까 이리저리 인터넷을 뒤졌다.
그런데 도무지 마음에 드는 걸 찾을 수가 없을 뿐더러 가격에 비해 너무들 흔하게 들고 다니는 모양 천지라
사고픈 욕망이 저절로 사그라 들어버렸다.
그 바람에 잔뜩 기대에 차 날 바라보던 친구들 김도 팍 사그라져 버렸으니~~
 
올 한해는 이런 문제가 꽤 질기게 내 머릿속을 성가시게 했었다.
그리고 한 때는 내가 살고 있는 모습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도 했고.
 
그러다 몇 달 전, 쿠바 사람과 결혼하게 된 한국여자가 찍은 다큐멘타리를 보게 되었다.
쿠바에서 살고 있는 한국이민 후세 친척들을 인터뷰하러 갔다가 안내를 자청하는 쿠바 청년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 다큐 감독의 이야기였다.
선진국도 아니고 살기 어려운 나라의 청년과 -그것도 특별한 직업도 없는- 결혼한다니 신부의 가족들은 환영은 커녕 몹시 걱정을 하고 이 와중에 신랑이 결혼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서울의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있는 화면 속의 그 청년을 보면서 내심 잘난 척을 했다.
'쿠바사람이면 한국에 대해 잘 모를텐데 서울에 와서 얼마나 놀랐을까?
뉴욕도 별 부럽지 않을 광경을 봤을텐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내 얄팍한 예상을 딱 알아들은 듯 화면 속 쿠바 청년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한국에 대한 애기를 했다.
'소비, 소비, 소비만을 위한 세상이다' 라고.
 
혼자 그 장면을 보고 있었지만 정말 정말 쪽팔렸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구, 창피해.
화려한 도심을 지나는 버스 속에 앉아 복잡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그 청년을 보면서
나를 다시 생각해봤다. 

사실 잘 안다. 나의 수동적인 소비성향이 무슨 철학이나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저 게으름 때문이라는 걸.
뭔가 살 것이 생기면 그 많고 많은 사양과 조건들을 언제 다 맞추고 어디서 찾아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골이 땡땡거린다.
거기다 미련하게 미련이 많아 그저 무뚝뚝하니 말도 없는 무생물체 책장에게서 오래 같이한 시간을 안타까와하고 트럭에 실려가는 헌 세탁기 보며 처음 장만할 때 그 사연이 되새기져 눈물 글썽거리니 상점의 새 물건이 내 것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요원할 밖에.
 
지난 주말 큰 맘 먹고 장만한 새 책장에 책을 정리해 넣느라 양 손목이 저리게 힘들었다.
두툼한 원목 책장이 참 마음에 든다.
남편이랑 같이 쳐다보다 '대대손손 물려내려 쓰겠지?' 했더니 남편이 그럼~~ 하다가 멈칫, '나중에 며느리가 이딴 고물은 그냥 버리자 그럼 또 모르지' 한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또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살짝 섭섭하긴 했다.
 



  나리타산 2012/12/04 10:01
  김장 잘 끝내셨는지요?^^ 몸살 하고 계신건 아닌지 했답니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하려는 '애착'이 강해서 그러실 거라 생각해 봅니다.
저도, 멀린님 만큼은 아니지만 애착이 강한 물건들은 잘 못버리는 편이랍니다.
새로운 물건을 장만하는 즐거움 쪽 보다는 '떠나보내는' 허전함 쪽이 더 큰 경우가 그렇더군요.ㅎ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도 한국이 명품앓이 하기 훨얼씬 전,
한 명품 하다가,,, 별루 재미없는 허망한 집착이라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면서
명품 집착이 거품처럼 사라지는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ㅠㅠ
철이 없었던 껍데기였다고 지금은 그케 생각하지요.
저는 ,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명품을 밝혔다기 보다는( 가당찬은 자기변명^^)
주제파악을 못해가지고 설랑은 소유하는 그 순간의 만족, 사러 갔을때의 쾌감,,,
머 그런 요즘 덴장간장고추장 녀인들의 심리를 이해는 합니다.
근데.
참 이상한거는요,,, 명품끊고 나면 마음이 그케 편할 수가 없어요.
'집착'이 없어진다는 건 마음이 가볍고 자유로워진다는 거구나,,,
사람에 대한 '집착'도 그러한 거구나,,, ( 입산의 경지^^)

멀린님이 떠나 보내신 그 책장은 감사한 마음으로 떠나갔음이 분명합니다.
'오랜시절 아껴줘서 고마워요,,,' 또한,
새로 맞이한 그 책장은 ' 이 댁에 오게 되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하고
있을겁니다. ^ㅇ^  
  merlin 2012/12/04 16:26
  꼬랑꼬랑하면서도 드러눕지는 않아 그나마 저질 체력이 좀 나아졌구나 했더니만
나리타님 걱정해주신 덕이었네요.ㅎㅎㅎ 감사드립니다^^

지난 달엔 부산에 일이 있어 4번이나 다녀왔어요.
그 와중에 김장하고 책장 들이느라 모든 책 다 꺼내 정리하고~~

나리타님이 명품백 좋아하셨다 해서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아니라
전 정말 멋있고 센스있게 입을 것 입고 갖출 것 갖춘 사람을 참 부러워하고 좋아한답니다.
친정엄마가 항상 그러세요. 멋부리는 것도 부지런한 녀자들이 할 수 있는거다!
전 그런 면에 감각도 없을 뿐더러 고르고 차려입는 부지런함도 없어 가끔은 저 스스로도 안타깝답니다.
전엔 롱부츠로 자전거 타신다던 나리타님 글 보고 아~~ 나도 롱부츠 신고 폼나게 자전거 타보리라 작심을
했건만 빵빵한 종아리, 가죽으로 졸라맬 생각을 하니 에휴~~
아직 운동화 신고 돌아다니는 중이예요.

대신 위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방에 뒷장이 퍽 날라가버린 책장은 결혼하면서 장만한 것인데
그리 비싼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툇물 취급을 해버리는 게 더 미안했어요.
글쓰면서도 제가 바보같네요.ㅠ.ㅠ
누가 마이크로 마인드 아니랄까봐~~~
조금씩이라도 바꾸려고 노력하는 중이랍니다.
이렇게 똑같은 모습으로만 살게 되면 너무 지겹고 시시할 것 같아서요.
멋낼 수 있는 간단한 힌트, 항상 환영!!!입니다.^^  
  디페쉬모드 2012/12/07 13:59
  음,,,저도 명품같은 것은 뭐 별로.....
어느날 여동생이 꽤 고가의 옷을 들고 와선 매제가 선물한거야 하는데.....그 매제는 상당히 고가의 브랜드 뭐 중역인가 그렇고....한번 입어보고 괜찮네 했는데 그 뒤로도 뭔 때만 되면 계속 명품들을 들고 오는 겁니다.
원 혀도 잘 안돌아가는 그런 명품들...그냥 고이 모셔두고만 있죠.

뭐가 좋은 건지도 잘 모르겠고 사치아닌가 싶어요.

전 그냥 필요하다 싶음 중고장터나 온라인쇼핑해서 사는데 그러저럭 쓸만하고 그래요.

그때마다 책이나 서재욕심만큼 다른 욕심도 좀 가져보라고 쿠사리를 먹긴하지만  
  merlin 2012/12/08 13:37
  왜 그냥 모셔두고 계세요?
잘 만든 옷 멋있게 입으심 진짜 근사하잖아요.
저야 태생이 안될 뿐더러 학습도 안되어 안타까운데.
가끔씩 상상해 본답니다.
전담 코디가 옷 좍~~ 골라 이거 입으세요! 하고 주면 참 좋겠다~~ 하구요.ㅋㅋㅋ

다음에 어디서 뵐때 꼭 명품 양복 입고 나오삼^^
 
  호주돌팔이 2012/12/08 07:58
  이모님 임종 때 힘드시겠어요.
그 많은 물건들, 기억들,사람들 어떻게 놓고 가실까요...?  
  merlin 2012/12/08 13:42
  호선생님~~
나 더 살게 해주우~~~ 책장도 아깝고 그릇도 아깝고 블로거 친구들하고도 더 놀아야하는데~~
아까워 어떡해~~~
얼릉 불로주사 맞춰주~~~ 애비야~~~

ㅋㅋㅋㅋ 무섭죠.  
  호주돌팔이 2012/12/08 18:47
  복용천국 불신지옥입니다...  
  merlin 2012/12/10 18:52
  처방 잘 해주삼^^ 
  하수달 2012/12/10 10:02
  저도요. 사람이 명품이면 명품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잖아요. 정말 맘에 들고 질이 좋으면 모를까 '나 명품이에요'하면서 들고 다니는거 보면, 속으로 소유와 존재는 동의어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merlin 2012/12/10 18:55
  정말 맘에 들고 질도 좋고 저한테 딱 어울리면~~~ㅎㅎㅎ
제가 한창 고민을 할때 동네 언니가 그랬어요.
"멀린아, 그런 거 사지마라"
"왜?"
"니가 들면 짝퉁인줄 안다"
ㅋㅋㅋㅋㅋ 소유는 물론이고 존재도 아닌가봐요.ㅎㅎㅎㅎㅎ  
  화분2 2012/12/10 10:31
  맞네요. 사람이 명품이면 다른 명품치장이 필요가 없지요^^  
  merlin 2012/12/10 19:03
  가끔씩은 저도 멋내면 속과 밖이 같이 잘 어울리는 명품 비스무리한 사람이 되고싶다~~는
마음이 불끈 생기기도 하는데 그것도 멋을 갈고 닦아 본 사람이 하는 건지라. ㅠ.ㅠ

야~~ 오랜만이십니다.
잘 지내시지요?
여긴 지금 동토의 나라입니다.
거기도 추운가요? 
 
  queen314 2012/12/19 22:18
  물건이든 양식이든 소중히 유용하게 오랫동안 간직해가며 쓴다는 것은 ....
그것을 만드신 분에 대한 예의죠....

자동화 기계로 찍어내는 물건에....그런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런 물건들이 우리 주위를 채우니.... 사람생각도 황폐해 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황폐해지니.... 만든사람의 수고를 생각해볼 겨를 도 없고....
 
  merlin 2012/12/20 21:59
  여기로 이사올 때 결혼하면서 장만한 화장대를 버렸어요.
이삿짐 날라주던 아저씨가 차에 실어줄 테니 갖고 가라고, 요즘은 이렇게 잘 만드는 가구가 아예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저 답지 않게 그냥 버렸다가 두고두고 후회를 했답니다.
요즘 만드는 건 가구고 옷이고 구두고 정말 엉터리가 많아 두고 쓰기가 참 힘들어요.
모든 게 그냥 일회용품 같네요.

아, 화장대는 새 집에 붙박이로 달려 있어서 버린 건데 수납할 곳이 부족해 마구 후회했지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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