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녀석 침대 커버를 바로 잡으려고 이불을 들치는데 뭐가 손에 박힌다.

이런, 또 야구공이!
뒤를 돌아다보면

엎드려 방 닦다가 저 빳따가 넘어지는 바람에 몇 번 맞아도 봤다.
아들아이의 첫번째 꿈은 버스운전사.
제대로 머리가 굳기 시작한 후로는 무조건 야구선수였다.
서너살 무렵 남편이 사다 준 플라스틱 야구 배트와 비닐 글러브로 죽자고 연습을 했다.

사진으론 안 보이지만 이십 여년 묵은 비닐 글러브는 너덜너덜 거의 삭았다
해가 져서 날이 어두운데도 공이 잘 보인다고 억지를 부리며 아파트 공터에서 캐치볼을 하고 배트를 휘두르던 녀석 때문에
남편은 머리를 쩔래쩔래 흔들면서도 불평 안 하고 코치 역할을 해냈다.
그뿐이랴.
깜깜해지고 나면 종이를 조그맣게 뭉쳐 공을 만들어 집안에서 까지 던지고 받아치곤 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우연히 이웃 동네에 클럽 야구 팀이 있다는 걸 듣고 연습장에 아일 데려갔다.
집에서 전철로 대 여섯 정거장 떨어진 공원에서 꽤 많은 아이들이 연습하고 있었고
리틀야구 경기에도 정식으로 출전하고 있다는 얘길 듣고 반가워 당장 가입을 시켰다.
신이 난 아들 녀석은 혼자 전철을 타고 부지런히 연습을 다녔고 유니폼을 맞추지 못해
남의 옷을 빌려 입었지만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데
그 경기라는 것에 부푼 마음으로 갔는데.
전부 초등학생이고 그 중엔 3, 4학년 꼬마들도 있었는데 엄마는 물론 아빠들 까지 죄 따라 온 것은 좋은 일이지만
경기 내내 그 아빠들은 무슨 목숨 걸려 있는 중요한 시합에 온 마냥 애들에게 소릴 질러댔다.
못 쳤다고, 공을 놓쳤다고, 못 던졌다고.
정작 감독이라는 사람은 뒷짐지고 모른 체하고 딴 전인데.
미국 영화에서 보던 화기애애하게 격려하는 분위기를 상상한 것 까진 아니더라도
그렇게 어린 애들한테 죽자고 욕을 해대는 부모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지레 겁이 나 움추러 들었다.
경기는 졌고 아이들은 아빠들에게 욕 먹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기죽은 채로 그날 일정이 끝났다.
돌아오는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들었는 지 모른다.
그 다음날,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원래 회비가 7만원이지만 그걸로는 운영이 어려워 더 내야 한다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다.
그런데 여분의 회비에다가 이래저래 돈이 들어가니 좀 더 내란다.
좀 이상하다 했지만 에잇, 애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따지기도 그래서 그러마 했다.
그런데 이번엔 경기 끝나고 회식을 하니까 회식비로 더 내야한단다.
무슨 회식을 하냐고 물었더니 삼겹살 집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는댔다.
부모들도 같이 가고 술도 하냐니까 그런단다.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애 얼굴을 떠올려 참아야지 하고는 그럼 이걸로 끝이냐니까 그렇단다. 결과, 14만원.
그런데 그 다음날 이번엔 어떤 여자가 전화를 했다.
어제 감독이 말을 못했는데 감독비가 너무 박해서 2만원씩 더 내야 한다고.
실례지만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감독 아내라고 했다.
팀 운영을 돕고 있다고.
알았다고 하고는 저녁에 난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야구클럽에 이 달만 나가고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솔직히, 아이에게 어디까지 말을 했는 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름 설득하느라 설명을 했겠지만 구체적으로 돈 얘길 한 것 같진 않다.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용도와 그 이상한 구실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부모들이 끼어들어 욕하고 술잔치로 끝내는 모양새가 견딜 수 없었는데
그 내용을 아이에게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을 거다.
아들아이는 별 다르게 싫다 소릴 하지 않고 한 달만에 운동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과 야구팀에서 열심히 뛰었고
졸업하고는 선배 회사 사회인 야구 팀에 끼어 들어가 열혈 선수로 활약 중이다.
돈 만원에도 달달 떠는 녀석이 비싼 글러브가 중고 시장에 나오면 끙끙 앓다가 사기도 하고
졸업하면서 과 야구팀에 배트를 사주는 대견한 일도 하고,
사회인 야구팀 연회비 십 여만원을 아낌없이 송금하는 걸 보면서
어릴 적의 야구 사랑이 진짜였구나 감탄하곤 한다.
그렇지만 내 깊은 속은 몹시 아프다.
서로 말은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 때 아이가 그 클럽에 나가는 걸 얼마나 좋아했는 지 잘 알았기 때문에
항상 그 일을 다시 저울 위에 올려놓고 재어 보곤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녀석이 다른 애길 하던 중에 그 얘기를 슬쩍 했다.
싫었다, 괜찮았다 가 아니라 '엄마가 그만두라 해서 암말 않고 그만뒀잖아'
난 묻지 못했다. 싫었니? 엄마가 괜히 그랬나? 차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때 부모들이 그렇게 험하게 행동한 건 대학입학 때문이란다.
초등학교에서 잘 해야 야구 잘하는 중학교에 갈 수 있고 또 그렇게 대학까지 연결이 된다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아이의 세계에 엄마 아빠는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참 힘든 얘기다.
아이 초등학교 때 촌지를 바라는 담임을 외면하는 나를 보고 제부가 심각하게 물었었다.
"교실에서 담임하고 마주하는 사람은 처형이 아닌데 왜 처형의 판단을 내세웁니까?"
공부를 아주 잘했던 제부는 항상 반장에 뽑혔는데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담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나중엔 '넌 그 흔한 빗자루 몽댕이도 하나 못 사오냐' 하는 모욕적인 소리까지 들었다고.
그때 난 '그럼 부모의 가치관은 무슨 소용있냐'고 대답했는데
나 자신도 학교에서 당하는 아이 마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에는 답을 찾지 못했다.
이만큼의 세월이 지났어도 난 야구 클럽에서 겪었던 그 일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난 그런 분위기 속에 내 아이를 두번 다시 들여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가치관 때문에, 나의 불쾌감 때문에, 나의 신념 때문에
아이 마음에 깊은 상처와 아쉬움을 남겼다는 게 정말 가슴 아프다. 그래서 많이 후회를 한다.
내가 싫은 걸 피하는 대신 아이가 온전히 겪어내야 했으니.
이제 아들 녀석은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부모의 몫은 남아있고 난 여전히 그 한계를 구분짓기가 힘이 든다.
부디 내 마음을 헤아려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