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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비가 오네

by merlyn 2010. 4. 23.
종일 마음이 뒤숭숭하다.
비까지 오네.
 
어제 저녁 사촌동생이 집에 왔었다.
아이 돌때 오고 처음인가?
놀러 오겠다는 전활 며칠 전에 받고는 내내 뭔일일까 궁금했다.
마흔 중반 넘어까지 결혼을 안 했고 몇 년전 중한 병에 걸려 수술을 받았던 동생이라 어른들이 얼굴 마주하면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집안 행사에도 통 나타나지 않아 서로 볼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야무지게 사는 것 같아 에이~~ 하면서 이모들 두고 편도 들어주었고 그저 잘 지내겠거니 믿었던 동생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집에 오겠다고 하니
결혼을 하나?
몸에 뭔 이상이라도 있나?
부모에게 얘기하기 힘든 고민이 있나?
집안에 일이 생겼나? 내내 걱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주 명랑하고 밝은 얼굴로 들어선 동생은 나이보다 열 살은 젊어 보였다.
건강을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 걸 알고 있어 나물과 해산물로 저녁을 차려 같이 잘 먹고
이런 저런 주변 얘기를 하는데 오랫동안 해오던 일을 접었다고 하면서 좋은 아이템이 있어 그 일에 전념하련다는 말을 꺼냈다.
 
동생은 새로 생긴 천연화장품 회사에서 일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름 많이 준비해와 여러가지 설명을 하는데
안타깝게도 화장품 부작용에 대해서는 내가 예전에 일하던 단체에서 어지간히 공부했던 거라 충격적인 것도 놀라운 것도 없었다.
게다가 저도 눈이 있으니 서로 못 보고 지낸 세월동안 언니가 어떻게 살아왔나를 짐작할 수 있을 터. 난 화장 때문에 이민갈까 생각해본 위인이다.
 
지하철 역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새로운 일이랍시고 시작했지만 만만치 않았으니 여기까지 날 보러 왔겠지.
화장품 팔러 온거 아니라고, 언니도 애 다 키워 할 일 없을테니 같이 해보자 온거라고 말은 했지만 내가 그럴만한 재능을 못 갖췄음은 이제 저도 알고 나도 알만한
급할 때 날 생각해낸 것을 좋다해야하나 싫다해야하나.일이었다. 
 

아버지 문병이라도 한 번 오고 날 찾았더라면  좀 덜 섭섭했을 것을.
 
 


호주돌팔이 2010/04/24 12:25
  지금 그런 감정을 품고 계시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호주돌팔이 2010/04/24 12:26
  호주사는 제마눌, 화장할 날이 별로 없지요.
선크림이나 바르고 땡~!
merlin 2010/04/24 22:46
  이십 여 년만에 부러 전화하고 집으로까지 오면서
제가 어찌 받아들일까 생각 못했다는 게 화가 나던대요.
철없다 넘길 나이도 아니고.

그냥 호주로 이민 가버릴까요?
사진으로 잠깐 곁눈질했을 뿐이지만 마눌님 참 건강해보이셨어요.
청학동처녀 2010/04/26 00:32
  근래에 저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오만가지 감정이 뒤엉켜서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merlin 2010/04/26 08:21
  맘놓고 화내는 것도 잘 안되고 그렇다고 이해하자니 좀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이러든 저러든 저 자신이 무슨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더군요. 휴~~
대갈마왕 2010/04/26 09:58
  안되면 되게하라. 하면 된다.
그 말이 맞고 안맞고는 생각하기 싫고...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거부하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그 분이 그런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래보여서.
잘못이 보여도 꾸짖지 못하는 신세가 참 처량할 때가 있죠.
사는게 참 이래저래 구김살이 많습니다.
merlin 2010/04/26 10:19
  제 앞에 앉아 열심히 설명하는 동생을 바라다 보면서 어떤 과정이 저 정도의 확신을 심어주었나 생각했습니다.
마왕님 말씀대로 내가 진짜 언니면 '너 이러면 안돼' 하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껍데기로 점잖게 대한 게 더 나쁜 거 아닌가~~~ 아이구 복잡해요. 정말 머릿속에 주름살이 확확 느네요.
산방여인 2010/04/26 12:58
  요즘 다 살기가 팍팍해서 그래요..
얼마전 다이어트건강식품 이라며 뜬금없이 찿아온 친구를 박정하게 대할 수 없어 구입한 것이 있는데..두어번 먹고 그냥 있답니다..저야 항상 생얼인지라 아무도 화장품은 권하질 않아요..이걸 환영해야 하나? 외국여행 갔다오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갖다주는 화장품이 수월찮게 있어 다 남들 준답니다..스킨..로숀..썬크림...이것이면 땡..
아는 사람이 의논할게 있다면 겁이 덜컥나는 요즘 세월입니다...^^
merlin 2010/04/26 14:18
  놀러오겠다는 말에 어찌나 걱정을 했던지 보내고 오는 길에 괜히 저 스스로에게 민망하더군요. 바보같기도 하고.
저도 일부러 화장품 사는 일은 참 없어요. 동생이나 엄마가 주면 색이 맞든 안 맞든 그냥 바르고 다니다 지난 연말 난생 처음 제대로 된 립스틱을 하나 샀답니다. 그런 사람더러 고가의 천연화장품 얘길하고 있자니 동생도 많이 처량했겠지요.
queen314 2010/05/05 15:21
  듣고 보니 저도 가슴 아린 기억이 있네요.

큰 아이가 입을 겨우 뗄 무렵....집에 가보니 집사람의 사촌이 손님으로 와 있더군요. 한때 갖은 사치를 다하고 살만큼 위세 좋던 집안이 사업이 좀 않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인사하고 근황을 묻는데..남편은 회사를 정리하고 자기는 출판사에 취직을 했다고....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가 다니는 출판사에 조카에게 줄만한 것이 있어서 어떤가 보라고...

눈치없는 저는...
원래 책을 먼저 읽어 보지 않고 사는 법이 없고, 질 단위로는 책을 사지 않아서 나중에 한권씩 읽어보고 사야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책은 그런 책이 아니니 한번 보시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 내는 겁니다.

일순.. 분위기가 얼어붙고 분위기에 놀란 저는 재미있게 놀다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제방으로 들어갔는데..

얼마 안있어 손님은 가시고, 집사람이 120권이나 되는 아동 그림책 계약서를 들고 와 말없이 내밀더군요. 저도 말없이 싸인을 했지요.
그 후론 그 출판사의 책은 지금까지도 들여다 보지 않습니다.

그 비인간적인 상술로...피를 빠는 회사..
얼마나 많은 이들의 한숨이 거기에 새겨져 있을 까요 ?

'웅진 출판사' 하면.. 내머리 속에 그생각 밖에 안 떠오릅니다.

그런 친척이 인간적으로 나쁜게 아닙니다.
힘없는 사람들 등치는 상술이 고약한 거죠.

merlin 2010/05/05 19:08
  어! 마저 쓰셨네요.
저도 비슷한 기억이 있습니다.
친구가 찾아와 저 출판사 유아학습잡지를 내어놓았지요. 스티커도 붙이고 그림도 그리고 하는~~ 사정이 딱해 2년 정도 구독한 기억이 납니다. 저렇게라고 사는 걸 해결할 방도가 있음을 다행이라 해야하는 건지. 참 어렵습니다.
merlin 2010/05/05 10:46
  이런 일들이 꽤 있지요?
나중에 다른 사촌에게 전해들으니 열심히 일해 모아놓은 목돈을 금융다단계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입었다고 하네요. 그렇게 되고보니 적은 돈부터 다시 모으는 게 힘들다 느꼈나봅니다. 저 화장품도 일종의 그런 일 같다네요. 에휴~~ 서로 참 입장이 난감하지요.
queen314 2010/05/05 16:06
  대개 돈에 욕심이 넘쳐 잘못된 사람들이...재기한답시고..
그런 고약한 상술에 휘말리는 수가 많은데...
그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아니라..
주위 사람을 난감하게 만듭니다.

그런것을 사업이랍시고 하는 사람들은 "긍정적 사고, 적극적 사고, 웃는 얼굴"을 상투적으로 내세우며 힘없는 사람들의 등골을 뺍니다.

그렇게 해서 번 돈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적 번뇌가 묻어 있는지 알기는 알까요 ?

예) http://www.woongjin.com/woongjin_web/CEO.aspx

편력기사 2010/04/30 17:40
  저같이 불쌍한 사람한테는 친구들도 안오는군요....ㅠㅠ
merlin 2010/04/30 18:14
  누가 감히 예술가에게 저딴 짓을~~ ㅋㅋ
부럽사와요~~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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