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점심을 먹으며 아들 녀석과 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힘에 당하지 않으려면 힘을 가지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젊은이의 말에 소심한 중년은 힘을 실감해보질 않아 그리 무서워해 본 적도 그래서 부러워해 본 적도 없어 그런 열망이 내겐 무의미하다는, 역시 소심한 방어를 했다. 그러다 힘에 눌리게 되면 억울하지 않겠냐고 하길래 억울하지 않으려고 힘을 얻으려 애쓰기 보다는 힘과 맞닥드리지 않을 만큼 작은 위치에서 평안을 구하겠다고 비겁하게 답했다. 비슷하게 이어진 여러 얘기 끝에 아들은 엄마가 그야말로 대범한 건지, 현실감각이 도무지 없는 건지 이해불가라 했고 난 주저없이 옙, 현실감각 빵점 올씨다, 자백했다. 그러기엔 현실의 힘에 대해 꽤 소상하게 알고 있는 듯 얘기하지 않았냐고 다그치기에 그거 다 뻥이었다 하고 내뺐다.
젊은 놈들은 꼭 이렇게 항복을 받아낸다.
나찌가 프랑스를 점령하던 시절, 파리 지하철 역에서 프랑스 젊은이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친구더러
"자신이 믿고 있는 정신적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건 바보같은 짓이야 " 하고 말했다.
바로 그때 마침 그들 곁을 지나던 독일군 장교가 권총을 꺼내들어 그 젊은이 머리에 겨누었다.
"방금 한 그따위 말을 다시 한번 더 하면 이 총으로 바로 쏴 죽여버리고 말겠다"
그러자 청년은 고개를 빳빳히 세우고 그 독일군 장교를 노려보면서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방금 자신이 믿고 있는 정신적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했소"
독일 장교는 그 청년 이마를 겨누고 있던 총을 거두고 웃으면서 "당신은 지금 당신 말과 행동이 모순된다는 걸 스스로 증명해 보인 셈이요"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진짜 있었던 일인지 아닌 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알베르 까뮈가 즐겨 말하던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 내면이 감추고 있는 용기와 힘을 드러내 보이는 이 일화는 읽을 때마다 가슴 벅차다.
그러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잘나지도 않고 운도 좋아 (이런 목숨을 건 갈림길에 설 일이야 아무나 겪은 일이 아닐테고) 그야말로 나의 정신적 가치를 흔들어 놓을 선택의 위기에 처할 일 없이 살아올 수 있었음에 감사드리곤 한다. 지금껏 내가 해야 할 선택이라는 것이 만인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양심에 조그만 흉터가 되거나 그저 혼자 우쭐거릴 정도의 사소한 것이었으니 이 정도의 존재감이라도 유지하고 살고 있음을 안다.
그리나 또 한편으로, 저 이야기가 반대의 방향으로 이어졌더라면 하는 상상을 해보면 참으로 참담하게도 비슷한 예를 꽤 쉽게 끌어다 보여줄 수 있는 게 내가 처한 현실이다.
'청년이 내가 믿는 정신적 가치에 목숨을 걸 수 있다 확언했는데 독일 장교가 총을 겨누었고, 이내 아니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소 했다'면~~
난 아직 팔자가 좋아 이런 행동을 한 여러 사람들, 한 때 내게 영웅이었고 롤모델이었으나 이내 역시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육두문자나 날리며 살고 있다. 난 크게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처지에 있으니.
나이가 들면서 점점 욕지꺼리나 해대는 일도 두려워진다. 삶은 그리 수월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며 산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깨달아 가는 것이다.
아들녀석에게 고백한대로 그저 입으로만 나의 정신적 가치에 대해 떠들었을 뿐 나의 신념은 남들의 공증을 받을 가치를 가진 적도 없었고 그걸 시험해보여야 할 상황에 처해 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공염불~~
"흔들리면서 깊어지기를"
자신의 대학생 아이에게 이런 말을 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엄마를 난 참으로 존경한다.
평안히 현실에 안주해 살아오면서 얻은 나의 삶의 깊이로는 입으로만이라도 흉내내기 힘든 다짐이다. 아이더러는 나의 것과는 다른 넓은 세상에 나가 많은 것을 경험하고 커다란 마음을 키워 살아라 부추키면서 실제로는 콧구멍만한 내 세상을 보여주는 게 다였다.
"흔들리면서 깊어져라. 어떤 힘 앞에서도 절대 너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라. 인간이 가진 진짜 힘을 우린 감히 짐작하지도 못한단다"
이렇게 말헤놓고도 떨리는 엄마의 소심한 마음을 아들녀석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저 웃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