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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너무 오랜만의 나들이

by merlyn 2025. 3. 10.

지하철 타고 멀리 나가본게 언젠지 모르겠다. 춥기도 했고 워낙 나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랑 살다보니, 게다가 자꾸 늙어가다보니 매일 고만고만 집 근처에서만 움직이며 겨울을 보냈다. 그런데 어제부터 바람 속 차가운 기운이 가시고 햇살도 따뜻하다는 느낌이 오면서 허파에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점심 먹자마자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남편이 물었다. 

 

-어디 가려고?

-명동갈거야.

-거기 가서 뭐 하게?

-뭘 하든. 콧구멍 막혀 죽겠구만.

-나도 가?

 

 얼굴을 쳐다보니 가기 싫어 죽겠네 하고 있어서 혼자 가겠다 했다. 중얼중얼 '혼자 어찌 보내냔'다. 얼씨구. 나 혼자 논 역사가 몇년인데. 저런 얼굴하고 있는 사람 데리고 나가봐야 기분 상할 일만 생기니 그냥 혼자 가는게 훨 낫다. 점심 먹고 다 치워 놓고 화장도 하고 향수도 뿌리며 준비하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일로 전화가 왔다. 그런다고 내가 주저 앉을 줄 아냐? 놀려고 하면 귀신같이 일이 들러 붙는다. 대충 미루고, 넘겨놓고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나간 명동은 관광객으로 와글와글했고 길 한가운데는 가벼운 음식을 파는 포장마차로 복잡했다. 사람들 사이를 살살 피해 회오리 감자를 열심히 튀기고 있는 아저씨 옆을 돌아 성당으로 올라갔다. 특별히 갈 데가 없을 땐 항상 성당에 들른다. 조용한 성전에 가만히 앉아 본당 신부님이 당부하신 교황님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많이 편찮으시다) 45년 전 혼자 열심히 여기를 오가던 생각도 하고, 매번 무심히 보던 정면 스테인드글라스도 찬찬히 보고, 지겨울 즈음 나와 옆 건물로 가서 성물 판매소 구경도 하고 수사님이 만드신 소시지도 사고 다시 명동길을 돌아다녔다. 변화의 왕국답게 명동도 그새 참 많이 변했다. 있던 가게가 없어지고 새 가게가 생기고. 코로나 시절의 무섭고 기괴하기까지 하던 모습이 싹 사라져 그 변화가 반갑기까지 했다. 

 

 좁은 골목을 돌아다니다 퇴근 길 전에 집으로 가야지 하고 큰 길로 나서는데 뭐가 와글와글했다. 쳐다보니 갑자기 예수님이 지나간다. 아이구, 긴머리 가발 위에 가시관을 쓰고 빨간 피가 점점이 묻은 하얀 포대자루 옷을 입은 사람이 커다란 십자가(종이로 만든)를 어꺠에 매고 지나가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웃긴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놀란 눈으로 휴대폰을 꺼내 든 관광객도 있었다. 원래 이 사거리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다니며 예수 믿으라 외치거나 커다랗게 스피커까지 켜 놓고 성경을 읽어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젠 저런 퍼포먼스까지. 

 

 지하철 쪽으로 계속 걸어가는데 이번엔 신기한 모습을 한 청넌이 스쳐 지나갔다. 화장을 어찌나 곱게 했던지. 이게 뭐람? 물론 남자도 파운데이션을 바르거나, 눈썹선을 그린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입술까지 빨갛게 바르고 볼터치도 했다. 거기다 어울리지 않게 예비군복에 모자를 쓰고 있어 더 놀랐다. (하긴 뭔 옷을 입어도 어울릴 것 같진 않다) 어지간해서는 누굴 유심히 보는 일은 안 하는데 실례를 무릅쓰고 뒤돌아 봤다. 잘못 봤나 했는데 뒷태도 확실히 남자다. 끄응

 

 집으로 가는 지하철 속에서 문 옆에 금방 자리가 나 앉았다. 무릎 위에 책을 펴 놓고 한참 보고 있는데 뭐가 또르르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나서 보니 내 앞에 서 있던 아가씨가 떨어뜨린 모양. 얼른 몸을 숙여 뭔가를 줍더니 얼굴에 갖다 댄다. 아이라인을 곱게 그리는 중. 젤 아이라이너로 보이는데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얼마나 열심히 또 잘 그리던지 나도 모르게 쳐다 보다 아차 싶어서 다시 책으로 눈을 내렸다. 앉아서 화장하는 사람은 많이 봤는데 서서 하는 사람은 처음. 

 

몇 분 지나지 않아 이번엔 옆 문 쪽이 뭔가 부산스러웠다. 뭐지? 하고 돌아봤더니 멀끔하게 생기고 키도 훤칠한 청년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이건 또 뭐람? 가만보니 출입문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계속 춤을 추는 중. 지하철 속에서 살짝 정신줄 놓은 사람을 많이 보긴 했는데 그건 아닌 거 같고 진짜 춤에 꽂혔든지 무슨 오디션을 보러 가는 중인가보다 생각했다. 지하철이 땅속에서 나와 지상으로 달려도, 한강 다리를 건너도, 옆 사람들이 킥킥 웃어도 엄숙한 얼굴을 하고 계속 춤을 췄다. 까맣고 긴 외투도 멋있게 입었는데 괜히 내가 난감해진 느낌이었다. 역에 도착하면 얼른 옆으로 비켜 서서 내리고 타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고는 다시 문 앞에 나가 춤을 췄다. 공중도덕은 아는 청년이구만. 몇 정거장 더 가 그 청년이 바쁜 걸음으로 내린 다음 좀 더 가서 나도 내렸다. 

 

 오랜만에 한참 돌아다니니 특별한 걸 구경한 것도 아니고 아주 맛있는 걸 먹거나 사지도 않았지만 속이 시원하고 운동을 한 것 처럼 상쾌했다. 거기다 평소 전혀 생각도 못한 사람들도 봤네. 내가 갇혀 있던 긴긴 겨울 동안 세상이 변했나? 하긴 지난 겨울이 보통 시간이 아니였으니 다들 속내가 시끄러웠을만도 했다. 자주 나와야겠다. (남편 안 데리고 나오길 잘 했다. 같이 나왔더라면 얼마나 투덜거렸을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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