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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30년 묵은 비누

by merlyn 2009. 10. 17.



내겐 역사가 30년 된 비누가 있다.
웬 비누?
잊고 있다가 뭔가를 찾으려고 문갑을 뒤지다 보면 여기서 저기서 툭 튀어나오곤 하는데
버리기도 그렇고 이제와 쓰기도 그렇고~~
그러다보니 30년 동안 가지고 있게 된 물건이다.
좋은 비누도 아니고 사진에서 보다시피 당시 현대 필름을 사면
사은품으로 주던 걸로 보이는 손가락 두 개 만한 물건이다.
 

 

블로구에.jpg




 
난 대학 기숙사에서 무려 5년을 살았다.
(그래서 내겐 무리지어 있는 여자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기숙사에 살면 참 나쁜 것 중 하나가 - 아래학년일 때 -
주말에는 온전히 편안한 마음으로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는 거다.
당시 한창 성행하던 미팅에서 한 명이라도 비면 주선하는 선배가 아무 방이나 쳐들어가
별볼일 없이 방에 남아있던 1학년을 끌고 나가기 떄문이다.
 
그때 난 경상도 남자라면 바로 36계 줄행랑을 칠만큼 싫어했는데
-경상도 남자분들 화내지 마시라, 이런 경우 당연히 생기는 대 반전이 있으니-
기숙사에 상대적으로 경상도 선배가 많아
-그렇게 되면 미팅 상대가 경상도 출신이 될 확률이 확~ 높아진다- 
주말이면 괜히 초조해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그 때의 난, 할 수 없이 질질 끌려 다방에 나가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상대는 촌티가 쫄쫄 흐르는 경상도 촌학생.
 
이런 저런 뻔한 얘기가 드문드문 오고갔는데
그러다보니 이 학생 태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좌불안석, 안절부절~~
저희 마을에 재작년에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하는 거 부터 심상찮더니.
안되겠다 싶어 직접적으로 물었다.
 
> 여기 어떻게 왔느냐?
- 기숙사에 있다가 선배에게 끌려 나왔다.
> 기숙사로 돌아가는 방법은 아느냐?
- 전혀 모른다. 그냥 선배가 가자는 대로 왔다.
> 여기가 어딘 지는 아느냐?
- 것도 모른다.
 
괜히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실실 나왔다. 보나마나 호주머니에 지폐 한 장 제대로
들어 있지 않으리라 싶어 니네 기숙사 저녁 시간 언제냐 하고 물었더니 벌써 지났단다.
그래서 짜장면 먹을래 하고 중국집에 데려갔다.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사줄께 하니 안심하는 눈치.
다 먹고는 버스 정거장에 데리고 가서 번호를 가르쳐주고
그거 타면 종점이 니네 학굔데 거기서는 기숙사 찾아갈 수 있겠냐니까
얼굴이 환해진다. ㅋㅋ
마침 그 버스가 오길래 저거 타고 가라니까
불쑥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내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줄 께 이거 밖에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그게 바로 이 비누다.
 
남편은 가끔 이 비누를 볼 때면
그래도 꽤 인상에 남았었으니 여지껏 간직하고 있지 하고 슬쩍 놀린다.
이걸 왜 지금껏 가지고 있지? 하다가도 일부러 버리진 못한 거 같다.
비누라는 게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쓰기엔 크기가 너무 작아
결혼 짐에까지 묻어오면서 지금껏 남아 있었나보다. 
 
서울대 학생이라는 거 밖에 
이름도, 학과도, 전기가 재작년에 들어왔다는 그 마을이 어디였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 학생은 아마 이 비누를 까맣게 잊었을 께다.
원래 준 사람은 잊는 법이니까~~
 
p.s. 내 남편은 경상도 그것도 바로 우리집 아랫동네 살던 남자다.
- 물론 미리 알던 사이는 아니다. 만나고 통성명하다보니 그렇더라-
그래서 남편 형제들과 우리 삼남매는 몽땅 국민학교 동문들이다.
대학 다닐 때 내 확고한 남자관을 익히 알던 친구들은 지금도 만나면 키들키들 웃는다.
그게 비웃음이라는 걸 잘 알지만 어쩌랴 인생사 내맘대로 안되는 걸.
 
 

나리타산 2009/10/17 11:46
 
세면대로 델따놓고 비누로써의 운명에 맞게 살게?? 해 주심이...ㅋ

근데요... ㅎ
울 아쟈씨도 갱상도를 루트로 하고 말씨도 그쪽인데
저는 여엉 서울말씨 남자들에게 익숙을 못하겠더라구요.
행간의 의미랄까 미묘한 뉘앙스 캣취가 잘 안되서리...
모. 나중에는 익숙해지긴 합디다만서두.ㅎ

흠... 그 무리지어 있는 여자들에 대한 트라우마는 참으로 동감합니당..
저는 학교도 직장도 여자가 드문 곳을 다니다보니
지금 유치원의 엄마패거리 문화가 좀 힘들지요...ㅠ,ㅠ;;
merlin 2009/10/18 13:28
  저는 부모님이 이북이시라 태어나 사는 곳에 적응을 잘 못했습니다.
결혼하니 남편이 매일 화내는 거 같아 어찌나 무섭던지.ㅋㅋ
시집에 가면 시어머니가 화내시는 거 같고.

isshe님이 찜질방에 못 가본 한국사람도 있냐고 하셨는데
바로 그 트라우마 땜에 몬간답니다.
남편은 더운 곳이라면 후다닥~~
이번 기회에 요 비누 들고 찜질방에나 가볼까나?
isshe 2009/10/18 17:37
  30년도 더 된 비누각 포장이 참 좋아요. 꼭 유럽의 유능한 디자이너가 머리 쥐어짜고 만들어 낸 것 같아요.
와아~ 여자 기숙사에서 5년씩이나? (마구 신기)

경상도 남자들 대부분이 더운 곳을 안 좋아 하나 보군요.
전 혼자서도 찜질방 가는 거 좋아하는데. 이곳은 낮기온 영상 8도..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녁에 땀 좀 내고 오려고 해요.
merlin 2009/10/18 20:25
  저도 안 믿겨져요. 5년 세월이 ㅠ.ㅠ
줌인해 찍은 사진으로 바꿔봤는데
isshe 님이 디자인이 좋다고 하신 건 대단한 칭찬이지요?

근데 어디 계시기에 낮기온이 8도 밖에 안되나요?
한국 아니면 찜질방이 없을텐데. 설악산? 지리산? 어디든 좋은 곳?
isshe 2009/10/20 15:26
  아쉽게도 다시 독일이에요.
어제저녁엔 섭씨 1점5도였지요.

확대사진에 캄사!
근래 중북부 유럽 그래픽 디자이너 작업을 보면 저런 풍이 많습니다.
갠 적으로는 선명한 선과 군더더기 붙지 않아 맘에 들어요.
위악아찌 2009/10/17 12:55
 
키키

아주 재미나는 글이구만요


재작년에 전기 들어왔다면
호롱불 켜고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왔다는 이야기인데

완전히 선데이서울 표지 스토리감입니데이.

가만 가만....

이 스토리를 좀 더 극적으롬 만들어서

무시기 프로 같은데 내 보소

필시 당첨되어 텔레비 나로낍니더.

그러면, 그 남학생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예?


아이지

아니지

그러다가 남편분이
집에서 ㅤㅉㅗㅈ까 낼라... ㅋㅋ


merlin 2009/10/18 13:34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 합니다.

정말 말씀대로 호롱불 밑에서 공부해 서울대 갔겠네요.
그 생각은 해보지도 못하고 '야~~ 깡시골에서 자랐구나'만 했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라나 모르겠지만
이젠 그런 시골에서 서울대 가기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는 건
잊지 않고 살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위악아찌님처럼 감칠맛나게 사투리를 쓰면 좋을텐데
제 남편은 우왁! 우왁!합니다.
본인은 표준말에 가까운 사투리라고 우기지만 ㅋㅋㅋ
오후에 2009/10/30 23:48
  2년전 전기 들어온 마을이 고향이긴 하나 고등학교는 대도시로 유학했다는 얘기겠지요. 호롱불 밑에서 공부한게 아니라... 경상도면 대구나 부산, 마산쯤으로 유학했겠네요...
merlin 2009/11/18 22:32
  에고 왔다가셨네요.

어디서 고등학교를 다녔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우리 마을에~~ 만 기억이 나요. 말씀대로 학교는 도시에서 맞쳤겠어요.
청학동처녀 2009/10/18 23:30
  그 서울대생은 지금은 대머리와 배가 많이 나왔겠지요.
그 남학생도 머린님과의 미팅한 기억을 가끔씩은 회상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merlin 2009/10/19 08:57
  우와~~ 바쁘실텐데 댓글까지.^^
대머리와 뚱뚱배 상상하며 킥킥거리다 김샜습니다.
히끗히끗 흰머리에 뚱뚱배 제가 생각나서요.
대갈마왕 2009/10/18 23:54
  혹시 경남사천아니라던가요?
울 사무실 총장님이 딱 그분위긴데...ㅋㅋㅋ
merlin 2009/10/19 09:04
  ㅋㅋ
총장님께 여쭤보세요.
"총장님 고향에 전기가 언제 들어왔나요?"하고.

마을이름을 들었을 때 남해쪽인가 했던 생각은 나요. 사천이 근처이긴 하지요?
콜로라도 2009/10/19 01:37
  옛날 티비 드라마에 우리가 아주 가난하게 살 때의 이야기 인데 남자가 만주인가로 갈 때 동네 처녀가 줄 것이 없으니 길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하나 주워 주는 것 이 생각 나는 데 그 남자는 그 오랜 세월동안 그 돌맹이를 한시도 놓지 않고 여자 생각을 했다며 돌아 올 때 그 돌맹이를 그 처녀에게 보여 주 던.....ㅎㅎ
merlin 2009/10/19 09:14
  와~~ 정말 낭만적인 이야기네요.
거칠었을 만주에서의 생활 내내 호주머니 안에서 따뜻한 위안이 되었을 돌맹이.
-호주머니 안에 넣어 다녔다는 말씀도 안 하셨는데 저 혼자 낭만열차를 탑니다-
미시건돌이 2009/10/19 05:40
  조그만 물건하나도 좋은 추억이 깃들여 있으면 이렇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또다시 생각나게 해주는 글이네요. 남자로 태어났는데도
주로 여자들 많은 그룹에 끼여서 자라난 저는 오히려 남자들만 있는
분위기가 영~ 껄그러운 ... 희한한 경상도 남자랍니다. ㅎㅎ
merlin 2009/10/19 09:21
  남편은 삼형제, 남자반 국민학교, 남중, 남고, 공대를 나와서
여자 뒷꼭지도 제대로 못 보고 컸다는데
이상하게 남자들하고 잘 못지냅니다.
-비슷한 점이 또 있네요!-
제 친구들 노는 데 자꾸 끼려하고 거기서 나눈 얘기 재미있어하고.
친구들 모임이 번번히 부부동반이 되어버려요. 남편이 자꾸 나서서.
그래서 처제가 형부의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했어요. ㅋㅋㅋ
희한한 경상도 남자분들! 모여서 통성명 한번 하셔야 겠어요~~~
크리스 크리스 2009/10/19 07:32
  현대교역주식회사라면 현대 종합상사의 전신?
비누포장위에 현대필름광고가 있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EPL광고의 효시인가 보니다. 이건 아마 30년도 넘었고 잘 보관하시면 골동품이 될 듯합니다.
merlin 2009/10/19 09:35
  저도 현대계열 회사겠거니 했어요.
이 사진 올리고 나서 찾아봤더니 아닌가 봅니다.
(영문 표기가 다르지요? 글씨체나 한자는 말짱하게 비슷한데)
지금은 Pixon 이라는 사진인화 전문점으로 바뀌어있네요.

기둘려 보세요. 한 30년 쯤 더 지나면 진품명품에 나가 볼께요.
좋은 값 받으면 쪼끔은 늙으셨을 블로거님들 모두 초대해
맛있는 거 사먹을까요? ㅎㅎㅎ

또 상상열차 타고 가네요~~~~
호주돌팔이 2009/10/19 12:55
  근데 기숙사 5년?
낙지국 드셨나요?
기숙사가 좋아서 일년을 더 계시진 않았을 것 같고...
근데 비누가지고 부부쌈 안 나신게 희안합니다.
merlin 2009/10/19 19:16
  낙지라도 먹었으면 내탓이요~~ 했을텐데.
대학원 1년 보탰어요. 아버지는 가라하셨는데 엄마가 지집아 거기가면 시집가기 힘들어진다고 난리하시다가 내놓은 조건이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뒷목이, 으윽~~~~
기숙사 장기체류 신기록 세우고 귀신이라는 별명도 얻고 쪽 다 팔았지요.
결국 날 죽이시오! 하고서야 탈출했어요.

이런 일이 쌈날 일인가??? 내 신랑이 그렇게 찌질하진 않~~~~~지? 하다가
물어봤습니다. 별껄 다 가지고 있네~~ 했다네요.
뭬야! 너그러운 거야, 애정이 없는 거야~~ 호돌이님 부부쌈 내셨습니다.ㅋㅋ
호주돌팔이 2009/10/19 20:04
  여자들은 이래주면 안되고 저래줘도 잘못한 거래요...
저희는 8월에 호주에서 혼인 신고하고, 12월에 한국에서 돈봉투 수거하는 일 했거든요...

그 중간에... 일찍 가서는 마지막으로 가족이랑 더 많은 시간을 가져라 했더니, 자기를 안 붙잡는다고... 멀리 한다고 얼마나 뭐라고 하던지...
뭐, 지금은 애 두고 가라면 내일이라도 비행기 탈 사람 됐지만 말입니다...
merlin 2009/10/20 00:47
  남편이 딱! 맞는 말하셨다고 무지 좋아합니다.

제가 원래 엉뚱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가 했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맘이 복잡했을 꺼라나 뭐라나~~ 위기모면용 발언냄새가 나지요?
linen 2009/10/20 03:51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그 남정네도 그거 아직 기억하고 있을겁니다.^^

기숙사하니깐 저두 옛날 생각납니다.
대학가서 딱 1년 있었는데 그거이 한계였네요.
형제도 남자 사촌들도 죄다 남자 학교도 과도 여자 많지 않은데
기숙사만 가믄 여자들이 우글우글 것도 선배 후배 딱딱 챙길려하니 영 체질이 아니더라구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 학교 다닐 때 서머타임인가 해서 한 시간 돌렸는데, 기숙사 통금이 10시였거든요. 아 증말 해만 지면 들어가야는 딴 애들은 다 열씨미 노는데... 통금시간 맞추기 위해 기숙사 앞길 얼마나 뛰었던지 그거 생각하믄... ㅎㅎ
merlin 2009/10/20 08:21
  제가 살던 곳에서도 1년~2년 지내고는 많이들 나갔습니다.
주변머리없는 사람들이나 남았지요. 그러니 사는 꼴들이~~ ㅠ.ㅠ
저희 통금시간은 9시였습니다. 정말 놀만하면 집으로 뛰어야했으니.
그 언덕자락이 볼만했지요. 선배는 하이힐 벗고 뛰어서 스타킹이 다 없어진 채로 들어오기도 했어요. 지금도 그쪽으로는 머리 안돌린답니다. ㅎㅎ
교컴지기 2009/10/23 14:19
  오, 재미있군요...
merlin 2009/10/23 20:56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호주돌팔이 2009/11/09 19:39
  트랙백 걸었슴다....
꿈꾸는방랑자 2009/11/18 21:38
  30년전에 대학생이셨으면...ㅎㅎ
암튼 저보담은 선배시네요~
아,그 시절엔 저랬구나! 싶어
피식 웃으며 읽었습니다.
옛날, 그 분이 궁금해지기도 하구요.
뭐~~~~~잘 계시겠지요^^*ㅎ
저런 추억의 물건 제게도 있는데...
언제 함 꺼내 풀어봐야겠네요~
merlin 2009/11/18 22:35
  아들놈이 저때 나이를 넘어섰으니 오래 전이긴 하지요?

추억의 물건 있으시면 보여주세요.
저도 즐거워질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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