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차이

merlyn 2009. 7. 31. 14:46


한겨레 블로그에서



삼 년 정도 중학교에서 집단상담교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름이 그래서 그렇지 무슨 상담을 한 것이 아니고 '심성수련'이라는 제목하에 학생들과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하면서 소통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 주에 한 반씩 열 두어명이 조가 되어 학년 별로 다른 주제로 얘기를 하는데 수업 뒤에 하는 것이라 아이들이 처음부터 좋아하진 않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지루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하도록 애를 썼는데 그 중에 그래도 '타임머쉰'이라는 시간이 제일 인기가 좋았다.
 
3학년용으로 주제가 '직업'이었는데 아이들에게 미리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 다음 모두를 눈 감으라고 하고 가상의 타임머쉰에 태워 미래의 세계로 가게 한다.
 
"자~~ 여러분 모두 눈을 감고 미래로 가는 타임머쉰을 탑시다. 얼마 뒤로 갈까요? 25년 후 입니다.~~~"    (키들키들)
 
25년 후 어느 날 마흔의 내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을 뜨고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게 된다.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이며 식사 준비는 누가하고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 무얼 먹으며 출근하는 사람은 나가면서 뒤로 돌아서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바라보고 (아주 조용하게 몰두 시작!)~~~~
일하는 곳은 어디면 ~~`` 저녁에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무얼하며~~ 등등
이렇게 구체적인 하루 시간의 언급을 해주면서 드디어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상황 종료.
그 다음은 그렇게 바라 본 자신의 하루를 글로 써서 돌아가며 발표를 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해 보면 참 신기하게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크기가 점점 드러난다.
재미있는 세상이 무궁무진했는데 그 중 삼년 내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녀석의 미래!
 
"선생님, 전 미래가 두 갈랜데 어떻게 할까요?"
다 얘기해보라고 했더니
첫번째 성공 버전이 먼저.
 
<오늘은 무료진료소에서 일하는 날이라 더 바쁘다. 몇 년 전 드디어 여유가 생겨 내 병원 옆에 무료진료소를 열었다.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줄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어렸을 때 부터의 내 꿈을 이룬 셈이다. 이런 날엔 같은 의사인 아내가 병원에서 내 몫까지 다 해주어 도움이 많이 된다. 어쩌구 저쩌구~~~~>
 
그럼 두번째 버전은 실패니? 하고 물으니 그런 셈이란다.
 
<지금 몇 시지?
머리가 욱시근거린다.
옆을 보니 모르는 여자가 누워있다.
이런~ 벌써 9시가 다 됐네, 아휴~~ 또 수술에 늦겠구만, 젠장>
 
난 입을 딱!!!!! 벌린 채 그 녀석을 쳐다보다 한 마디했다.
"임마, 내가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너 의사 하지말고 소설가 해라"
("" 라는 말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지난 나흘 어릴 때 나랑 친했던 사촌동생의 아들 녀석이 집에 와 있었다.
중학교 일학년이 조카는 처음 보는 고모에게 두어 시간 낯을 가리더니 이내
칭얼대고 말 안 듣고 게임만 하고 그러면서도 실없이 웃기는 소리도 잘 하는
둘째 아들놈이 되어버렸다.
공부하라는 얘기엔 미치겠고 세상에서 엄마 잔소리가 제일 싫고 동생은 귀찮아
못살겠다고 툴툴거리고 세수하라니까 물만 훌렁 바르고 나와서는 뭣하러 세수는
매일해야느냐며 잉잉거린다. 딱 어린애다.
이런 녀석과 "아침에 일어나니 모르는 여자가~~"라고 읊어대는 녀석과의 간극이 너무 커
다시 생각해도 그저 어리둥절이다.
이런 녀석이 이 년만 지나면 어른이 되어버리는 건지, 아이들마다의 차이가 이렇게 큰 건지.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왕도가 없다가 진실일 밖에.
 
 
P.S. 여학생들은 연예인의 삶을 그린 경우가 꽤 많았다.
그런데 그 연예인이 연습도 하고 팬 사인회도 하고 텔레비 출연도 하는데
저녁만 되면 집으로 돌아와 정성껏 밥을 준비해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려 
아이들과 함께 맛있게 먹는 거다.
나중에는 "얘들아, 제발 니들 엄마 아빠를 잊어라!"하고 윽박질러야 했다.
 
그나저나  그 기발했던 녀석은 어떻게 살고 있을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