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괜찮은 인연

merlyn 2010. 9. 19. 14:32


<한겨레 블로그 시작하고 1년 만에 쓴 글>


블로그를 시작한 지 1년 반이 넘었다.
내 방 손잡이를 열어 본 사람도 3만명을 넘어섰고.
놀랍다.
 
1년 반쯤 전 한겨레 목요일판에 끼어들어오던 ESC에 에스프레소에 얽힌 사연이 한 편씩 올라오면서
그에 얽힌 새로운 글을 찾고 있었다.
에스프레소.
난 당연히 그때 병원에 5개월째 입원 중이시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와 에스프레소는 참 찐한 사이였으니까.
 
그런데 한겨레 측은 응모 글을 한겨레 블로그를 통해서만 보낼 수 있게 되어 해두었다.
그때까지 내게 블로그란 맛집 유람기나 여행기 같은 거나 담아두는 곳일 뿐이어서 좀 황당했다.
 
첫번째 생각, 한겨레 블로그라는 데가 장사가 무지 안되나 보구만. 이런 식으로 글 받는 걸 보니.
두번째, 그냥 확 무시하고 메일로 보내버려? 그래봤자 구닥다리 티나 내는 거지, 흥~
세번째, 집에 에스프레소 기계가 있긴 하지만 저 사진 속 커피 머쉰도 탐은 나네.
 
그래서 난생 처음 블로그라는 곳에다가 글을 썼다.
지웠다, 썼다, 또 지웠다, 썼다를 반복, 겨우 완성된 글을 올리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나보다.
뭔 절차는 그리 복잡하던 지.
두 번은 못하겠다 하고 블로그와는 끝이겠거니 했다.
그러면서도 돌아오는 목요일에 꽤나 신경쓰는 한 주를 보냈는데
얼라, 그만 똑 떨어져버린 것이다.
 
그 주에 뽑힌 글이 아주 세련된 것이라 유구무언이었지만 그래도 내심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던 터라
(그 기대와 함께 혹 당첨되면 갖게 될 또 하나의 에스프레소 머쉰을 어찌하나 에 대해서도 약간의 상상을 했었다)
좀 김이 새서 내 블로그라는 곳에 다시 들어가 보았다.
 
아유~~~~ 이 무슨 촌스런~~~
신파풍의 19세기 감성이 듬뿍 담긴 글을 보자니 저절로 한숨이 푹 나왔다.
비로소 생각을 해보니 내가 글이라는 걸 제대로 써본 게 십년도 넘은 게다.
그나마 죽도록 써대던 편지조차 이메일이 생기면서 장난처럼 호흡 짧게 대강대강 써서 보내는 게 다반사였으니.
타고난 문필가가 아닌 다음에야 뻔한 얘기지.
 
그래서 오기로 시작한 게 블로그에 글 쓰기였다.
억지로 쓰다보면 좀 늘겠지, 하고.
그렇게 시작했는데 막상 글을 쓰다보니까 누군가가 와서 보는 것도 무섭고
댓글 달아주는 건 더 무서워 조회수가 늘어나면
'오지마~~ 아무도 오지마~~' 하면서 혼잣말에 손짓까지 훠이훠이 했었다.
 
이 곳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블로거가 지적했듯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할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만난 친구들은 바깥 세상의 친구들과 물론 다르다.
어느 한편 내 이름, 얼굴도 모르지만,
어느 한편 하루가 멀다 전화하고 수다떠는 20년 지기보다 훨씬 날 잘 이해하고 내 마음을 세심하게 알아차리기도 한다.
세상의 친구들과 피붙이 형제들에게 조차 꺼려했던 속내를 불쑥 내밀어 보이는 건 그래서 충분히 가능하다.
 
'글로 만이야, 내 낯가림으로는 불가능이지' 했던 오프 모임에도 번번히 얼굴 내밀면서
결혼 이후 처음으로 자정을 넘겨 집에 들어간 것도 수차례였다. 
신기해서 관대해졌던 남편이 으르릉~하기도 했지만 그래봤자지 뭐. ㅋㅋ
 
글쓰기 연습장으로 시작했던 이 곳이 내게 새로운 세상 한 켠을 열어주어
난 전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더 따뜻하고 더 아프고 더 넓어졌다.
서로 문 두드리고 열고 닫는 창을 여러 개 가진 셈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아버지에서 이어진 인연의 고리 덕에 이뤄진 것이다..
아버지가 가끔 커피집에서 달게 드셨던 에스프레소 덕에 내게 다른 세상이 생겼고
그 세상에서 아버지를 잃은 고통까지 위로받게 되었다.  
 
삶의 인연을 어찌 짐작이나 하랴.
 
 
 
 

호주돌팔이 2010/09/19 16:56
  상당히 불순한 동기로 시작하셨군요...
merlin 2010/09/19 21:18
  이런 섭섭한 말씀을~~
그저 살림에 조그만 보탬이라도 되어보자 하는 순수하기 짝이 없는
동기였습니다요~~
호주돌팔이 2010/09/19 21:44
  호랑이 등 업힌 꼴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더군요...
언제 뛰어내릴 수 있을지,
언제 떨어질지 전혀 모르는 상황...

생각해 보면 시작과 너무도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뭐, 그게 나쁜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흐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여기서 또 어디로 흘러갈까요?
merlin 2010/09/19 22:39
  그 짧은 시간에 쌓아진 두꼐를 보면 참 묘합니다.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이야~~ 저도 나쁘다는 거 아닙니다.

이런 소통으로 이뤄진 관계가 현실적 관계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을 수도 있는다는 거,
글이라는 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jpic3044 2010/09/19 21:29
  블로그 주인만 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연으로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군요 ㅎㅎ
아줌마의 근성이 좋은 인연으로...

저 무장공비에요 ㅋ
merlin 2010/09/19 22:40
  ㅋㅋ
이름풀이 새로해야겠습니다.

네, 그런 사연이었습니다. 주부퀴즈프로 나가는 것 보담 나았지요?
어차피 상품은 못 받게 되는 거였으니. ㅋㅋㅋ
부추꽃청 2010/09/19 19:19
  블로그 주인만 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블로그를 너무 많이 돌아댕겼더니... 잠이 않왔나봐윰^^
블로그 중독(?)이 심해서... 글쎄요, 쉽지 않아요^^;;
하지만, 추석 전후로 헐크가 되거나, 향단이, 또는 이 나라의 국물이 될 듯 하여서... 조용할 겁니다.
추석에 요령껏 하시길... 얄밉게 노시길...지발 바래윰 ㅎ 여자로써! 친구로써! 동지로써!
merlin 2010/09/19 22:46
  모든 헐크, 향단이, 국물들이 즐거운 명절을 맞이하는 그날까정~~~~ 아자! 아자!
야시맘 2010/09/19 20:18
  새로운 세상 한켠에 따뜻한 멀린님이 계셔서 참 좋은데요.ㅎㅎ

이 글을 읽으며 좋은 인연이란 서로 노력해야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얼핏 스치네요.
merlin 2010/09/19 22:15
  따뜻하다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정말 제가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뚝 떨어진 호박 넝쿨에다가 노력을 합하면? 좋은 인연이 되겠다 싶습니다.ㅋㅋㅋ
나리타산 2010/09/19 22:38
  '인연을 소중히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시던
어떤 스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비록 그 스님이 제게 주신 그림은 영국 동생 가스나^^ 집에 걸려 있긴 하지만.ㅠ,ㅠ;;

그 말뜻이 참 깊어요. 이 세상에 가벼운 인연은 없다고...
멀린님이랑 저랑 주고 받은 댓글인연 결코 가볍지 않아요. 그쵸? ^^
(저만 짝사랑?? ㅋㅋㅋㅋ)

merlin 2010/09/19 23:20
  이건 양보 몬합니다. 제 사랑이 더 깊습니다. ㅋㅋㅋ

맞아요. 세상에 가벼운 인연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여기 인연은 참 유난한 듯 합니다.
오래된 친구도 있지만 그 친구들에게 못한 얘기를 풀기도 하고
또 그 친구들이 못 해줄 얘기를 듣기도 하고.
마음이 살찐 그런 기분입니다.^^
둥이맘 2010/09/20 08:59
  블러그에 충실하지 못하는 저는 마냥 부러울뿐..ㅎㅎ

여기 인연이 유난히 느끼는 이유는 언니의 넓은 아량과 포용력도 한 몫을 할겁니다.
한번밖에 만나지 않았지만요, 느낄수 있어요.
추석 잘보내세요.
merlin 2010/09/20 11:21
  아량과 포용력이라니요.
ㅋㅋ
제가 단순무식 지향자거든요.
그러다보니 복잡하게 생각하고 밀고 당기는 건 잘 못합니다. 그냥 널널~~~
그래서 그리 보이는 거랍니다.
ㅎㅎ
이번 추석은 길어서 한편 즐거우시겠지만 또 한편 무척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둥이맘님도 명절 잘 보내세요.^^
수리수리맘 2010/09/20 10:48
  멀린님 글을 읽고 있으면 항상 따스함을 느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 집에 자주 찾아 오는가 봅니다. ^^
merlin 2010/09/20 11:27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재주나 아는 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제 글이라는 게 그저 일상사 잡담이지요.
그럼에도 그리 말씀해주시니 진짜 고맙고 참 부끄럽습니다.

진짜 그리 살고 있는 지 이 기회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바다와섬 2010/09/20 17:25
  오~~ 에스프레소 응모전에 뒤늦게 감사드립니다! 멀린님이 여기 들어오신 계기를 마련해줘서~~~ ㅎㅎ
언제 한국 가면 맛난 커피집에서 벙개해요~~ *^^*
merlin 2010/09/20 22:58
  아이구~~ 그렇게까지!
제가 감사드릴 일이지요.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한국 오시게 되면 정말로 끝내주는 커피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먹는 곳은 모르는데 커피집은 몇 군데 안답니다.^^
청학동처녀 2010/09/20 23:15
  에스프레소하면 멀린님 아버님이 떠 오릅니다.
저에게 남긴 덧글이 너무 강렬해서요.
무장공비님 달걀만큼이나요.
merlin 2010/09/20 23:22
  주문할 때마다 커피집 사람에게 한 소리들으셔야 한다는 그 댓글인가요?
기억이 가물가물~~
청학동처녀님께 남긴 거의 첫 댓글로 기억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공비님 달걀에다가야~~ 진짜 잊지 못할 얘기지요.ㅋㅋㅋ

그나저나 여긴 추석이라 들뜬 분위기입니다.
비가 와서 달을 못 본다는데 파리에선 볼 수 있겠지요?
마음으로나마 풍성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청학동처녀 2010/09/21 00:04
  고맙습니다.
멀린 언니와 형부같은 남편분도 추석 잘 보내세요.
merlin 2010/09/21 00:11
  청학동처녀님도^^
파리의 보름달에게 안부전해 주세요~~
편력기사 2010/09/20 23:43
  ^^ 처음은 미약하였지만 그래도 멜린님 포스는 훌륭하십니다. 계속 집필(?)하시다 보면 일취월장 하실거고...
축하.^^
merlin 2010/09/21 00:17
  ㅋㅋㅋ
처음은 미약했으나 그 후로는 더더욱 미약하도다!
그냥 쓴답니다. 다시 읽어보면 모든 글이 쪽팔립니다만 그래도 계속 씁니다.
감사^^
deca 2010/09/21 01:24
  추석인사 남기려고 잠깐 들렀습니다.
올해는 비가 와서 보름달 못 볼 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그래도 맘으로는 풍성한 보름달 보시길 바래요.
또 종종 놀러오겠습니다^^
merlin 2010/09/21 10:40
  생각해보면 재미있어요.
여기서 달은 못 보지만 그 달은 여전히 떠 있고 슬슬 건너가
미국에서 얼굴을 내밀게 되겠지요?

기분은 안 나시겠지만 그래도 deca님도 풍성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장외자 2010/09/21 07:31
  블로그 주인만 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한 10년간 인터넷에 글 쓴 것 책으로 냈습니다. 글 잘 모아놓으세요^^
merlin 2010/09/21 10:43
  에, 블로그에서 봤습니다. 음~~ 유명인사시구나 했어요.ㅋㅋ
세월만 쌓인다고 그럴 수 있나요.
내용이 꽉차야 가능한 일이지요.
방에 가서 글 읽어볼 떄마다 부러워한답니다.

멀리서지만 한가위 떠올리시면서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醉~ 2010/09/21 11:24
 
취~의 필넷 입문 동기는... 겨울종소리님 때문.

그때... 한토마에서 참! 수구꼴통들과 연일 계속되는 전투 중 투구 벗어놓고 잠시 쉬고 있는데...
겨울종소리라고 하는... 한 어여쁠것이라 예상되는(?) 아씨가 비명을 지르지 뭐삼?

그래서 달려가보니...
한토마에서도 취~가 가장 좋아하는
다른소리님 특유의 욕폭탄에... 파편 맞은 것임.

그때 정의의 사도... 역시 취~랑 친했던...라이님이..
고발조치 다른소리님을 잘라버렸음... 큭큭큭...

암튼... 그때 겨울종소리님 위로 해주다...
우연히 블로그 인기글인가에서 겨울종소리님 글 보고...
한번 블로그 만들어본게 블로그 시작이었음.

근데 이상하게도... 겨울종소리님과는 글 섞어본 적은 거의 없음.
멀티로 쓸 수 있다는 것에 재미를 느낀 이후... 마냥 내 글 쓰기 바빠서.

;)

청학동처녀 2010/09/23 19:07
  한토마에서는 다른소리님과 프로비던스님이 최고였지요.
이 두분이 없는 한토마는 정말 재미가 없어요.
merlin 2010/09/21 21:15
  취님 블로그 동기는 역시 취님 답네요.
전쟁 중에 뛰어드셨군요.

정말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지요.
쓰는 걸 꾸준히 해낼 꺼냐 말꺼냐 했는데 친구들이 많이 생겼답니다.
블로거분들 그늘에서 이만큼 해낸거예요.

취님도 계속 마냥 바쁘게 글 쓰셔요.^^

참, 비가 그쪽으로 내려가고 있다는데 조심하시고
한가위 즐겁게 보내세요.
오후에 2010/09/22 00:40
  에스프레소 머쉰~~ 그런게 있었어군요. 알았다면 저도 응모했을텐데...ㅋㅋ
순전히 기계가 탐나서... 담에 그런거 있음 제게도 알려주셔요. 필넷의 인연으로요.
어른 돌아가시고 첫 명절이라 적응이 필요하시겠지만 그냥 편안한 명절 보내시라고 인사드리리게요.
merlin 2010/09/22 12:52
  에스프레소로 뽑은 커피는 필터로 내린 것보다 확실히 맛있답니다.
담에 그런 기회가 있으면 꼭~~~ 근데 알려드리면 강력한 경쟁자가 생기는 거네요.ㅋㅋ

고맙습니다.
항상 제 맘을 달래주셔서~~^^
문지방여인 2010/09/23 02:20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그때 그 에스프레소 이야기 저도 기억나는데.
참 알 수 없는 게 앞날이예요. 또 인연도 그렇고요.
그리고, 글 아주 잘 쓰셨습니다.^^
merlin 2010/09/23 10:05
  에이구, 뭔 말씀을~~ 진짜 쪽팔립니다.
가능하면 과거 글은 안 보려고 합니다.
그래도 가끔 '어, 이런 생각을 했었나?'하고 글을 통해 제 모습을 보는 건
좋은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nomusa 2010/09/23 11:29
  에스프레소 사연.
그런 게 있었군요.

저는 잠실에 제2롯데월드 건축허가를 해 준다는 기사에 욕질 댓글을 달려니까 블로그 만들어야 댓글 쓸 수 있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블로그 만들어 놓고 댓글만 쓰다가 한달 정도 지나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merlin 2010/09/23 21:56
  ㅋㅋ
욕하려고 블로그 만드셨구나~~
혈기 가득하셨네요.ㅎㅎ
이젠 많은 분들께 도움을 주고 계시니 nomusa님도 역시 '여기까지 올 줄이야~~' 하시겠어요.
푸름살이 2010/10/01 10:00
  저는 참문학의 밑절미 블로그를 가진 분이 알려주셔서 들어오게 됐지요. 그때부터 쭈욱 그냥 제 일상 올리고 있어요.^^
merlin 2010/10/01 10:50
  여전히 초심에 충실하시네요.
전 글쓰기 연습은 날라간 지 오래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