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merlyn 2009. 4. 20. 21:06



그런 경우가 있다.
그냥 신뢰가 안 가는, 근거도 하나없는 지레짐작으로 별론 거 같다 로 미리 판단해버리는.
알랭 드 보통이 그런 경우였다. 이 작가의 이름이 갑자기 도처에서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게 갑작스런 유행이란 믿을 게 못된다는 말과 동의어 처럼 들린다.
 
어찌어찌하다보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에 이어 이 책까지 읽게 되었다.
이유? 머리 아프고 마음 복잡한 터에 가벼워보여서.
 
아주 특이한 글이다.
단번에 두 가지로 나뉘어 버린다.
-내 이야기
-남의 이야기
 
'남의 이야기'는 참 재미있게 잘 쓰면서 '내 이야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각 나라 혹은 지방으로 갈때마다 가이드 삼아 옛 사람 -문학가나 예술가- 한 둘을 데려간다.
가이드를 통해 본 그 여행은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즐겁고 의미있다.
그러나 작가 보통의 여행은 지루하고 게으르다.
 
'열대의 바람에 살짝 기울어진 야자 나무 한 그루'의 사진 때문에
출발한 바베이도스 여행에서
작가는 항공사의 여행 일정표 마지막 줄에 있는 15:35 BA2155 도착이라는 표시와
자신이 머물 호텔 방 사이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 이 둘 사이에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 -입국장안에서 돌아가는 커다란 선풍기, 꽁초가 가득 담긴 재털이 위에서 춤추는 파리, 로터리의 호화 콘도 광고, 두 달이나 지난 채로 걸려있는 성탄 카드가 있는 호텔 접수대 따위 말이다-에 저항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런! 
이 작가의 여행 스케줄 표에는 '00시 비행기 탑승'과 '00시 현지 도착' 사이에 일어 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명시되어 있다는 건가?
내 옆에는 누가 앉을 것인지 내 뒷 좌석에는 버릇없는 어린 녀석이 앉아 땅에 다시 도착할 때까지 내 의자를 계속 차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것인지, 혹은 해 져서 깜깜한 밤하늘에 모래알처럼 잔잔히 환하게 빛나는 별을 볼 수 있을 것이지 아닌지 스케쥴에 다 나와있다는 말인가?  
 
화가 에드워드 호퍼와 혹은 보들레르와 플로베르 고흐를 앞세워 여행을 간다.
이 사람들의 일생에 관해 쓴 글이며 이들의 여행기는 참으로 즐겁고 흥미진진한데 - 플로베르에 대해 그렇게 배웠는데도 이 위대한 프랑스 작가가 프랑스를 그렇게 싫어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이집트 사람들 처럼 뒤통수에 머리를 한타래만 남겨두고 다 밀어버렸단다!- 자신의 여행기는 지루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다.

'여행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물을 볼 때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며, 질문이 없으므로 흥분도 일어나지 않는다......그것에 대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없었다'
크~~ 기막힌 여행자다.
18세기 자연 과학자 알렉산더 폰 흄볼트를 앞세워 떠난 스페인 여행에서 온갖 조사를 샅샅히 해낸 흄볼트와는 달리 작가를 마드리드 거리에 나가게 만든 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객실 청소원이었다. 방을 청소하려는 이 사람과 마추치지 않기 위해 길을 나선다.
 
처음 나선 외국 여행길이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섰던 마켓 스트리트에서 느낀 자유! 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사람의 심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역시 나 같은 사람이 있으면 또 이런 사람도 있는 법.
 
어쨋든 덕분에 다양한 이들과 함께 다양한 시선으로 세계 부분부분을 둘러본 셈이다.
다 읽고 나서도 뭔가 찜찜한 것은 제목과는 다르게 본인의 여행 기술이 너무 형편없던 터라
혹 내가 행간을 놓친 것은 아닌가 뒷통수가 땡긴다.
다시 읽어볼까나?    으~~음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