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고양이의 존엄

merlyn 2013. 5. 4. 12:07




며칠전 저녁 약속에 늦어 급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려고 하는데 어!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삐익~~삐익~~"

오른쪽 아래를 내려다 보니 세상에나!

작은 종이 상자속에 뭔가 까만 것이 마구 몸부림을 치고 있는것.

태어난 지 이삼일 됐을까? 작은 고양이가 눈도 못뜨고 엄마를 찾느라 그런지 계속 삑삑 소릴내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집으로 올라가려던 8층 아기 엄마랑 다른 집 아이 둘하고 그 엄마랑 난

이걸 어째~~이걸 어째~~ 만 되풀이 했지 뭘 어떻게 해야할 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렇게 어린 녀석은 두 세시간 마다 젖을 먹여야 한다고 들었는데.

상자 속엔 우유가 들어있는 작은 플라스틱 병과 함께 조그만 강아지 인형도 들어있었다.

누군가 감당이 안되니 이렇게 버린 모양이다.


우린 서로서로

"이걸 어쨰요" "이렇게 두면 죽을 것 같은데" "얘 그거 함부로 만지지 마" "누가 이렇게 어린 걸 내다 버렸지?"

이런 얘기들을 주고 받고 하다가 건너편 수위실 아저씨가 고양이 밥을 준다는 게 생각났다.

 

지난 겨울,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고 내리는 빗속에 고생할 떄도

아저씨가 해결해주었는데 싶어 얼른 수위실로 달려갔더니 안타깝게도 내일 당번이시란다. 

난 약속시간에 늦어 이걸 어쩌나 어쩌나 하다가 수위아저씨께 좀 가보시라고만 하고 전철역을 향해 뛰었다.

그리곤 내내 그 고양이가 머릿속에 왔다갔다 했다.

그 사이 죽진 않았을테니 얼른 집으로 가서 해결을 봐야지.

 

아파트에 들어서자 마자 우리 동 수위아저씨께 물었다.

"아유~ 그 고양이 땜에 애먹었어요. 태어난 날짜까지 적어 내버렸는데 물론 CCTV 뒤지면 잡을 수야 있지만

우리같은 수위들이 입주민 잡아 뭔 소릴 하겠어요. 욕이나 먹지,

그래서 119에 전화할까 3동 사는 길냥이 밥주는 아주머니를 부를까 난리들 쳤어요"

 

누가 시끄럽다 해서 잔디밭에 내 놓고 어쩌나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건너편에서 여기 살고 있는 길냥이가 어슬렁 나타나더란다. 이 녀석도 배불러 다녀 간간히 밥을 주는 사람들 걱정을 시키고 있는데 평소 사람들을 피해다니던 것과 달리 울고 있는 새끼 고양이 쪽으로 오더라고. 혹시 싶어 다들 자리를 피해 멀찍이 있었는데 새끼에게 다가가 냄새도 킁킁 맡고 혀로 털도 몇번 핥아주더니 목덜미를 물고 건너편 숲속으로 가버렸다고.

정말요? 하고 놀라 묻는 내게 아저씨는 "거참 신기하대요. 우린 영역 떄문에 물어죽일까봐 조마조마 했거든요. 그런데 망설이지도 않고 물고 가더라구요. 지도 배가 많이 늘어졌더만은~~~" 하시며 머리를 쩔래쩔래.

 

손바닥 반쪽만한 고양이 한 마리에 여러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걸 일격에 잠재우고 사라진 고양이라니.

저 한 몸도 추스리기가 휩지 않을텐데.

다음날 여기저기 뒤져봐도 그 녀석은 보이질 않았다.

할 수 없이 고기를 잘게 썰어 나무 뒤에 놓아주었다. 저녁에 가보니 깨끗이 비었다.

내 종족은 내가 거두니 밥이나 꼬박꼬박 내놔! 그러는 것 같았다.

 



바로 이 녀석이다. 지난 가을 처음 본 날 찍어둔 사진. 실제도 저렇게 오종종하게 생겼다.

 



  미시건돌이 2013/05/04 13:30
  고양이는 야생성이 강해서 그나마 저렇게 살아남을 확률이 강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던 가끔 애완용품점에서 입양을 기다리는 고양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더만요... 수술도 많이 시키고 하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이 돌볼 수 있는 수보다
많은 고양이, 개들이 태어나나 봅니다.  
  merlin 2013/05/05 22:43
  길냥이 번식력이 정말 대단해요.
여기 밥주는 사람들이 많아 새끼 낳으면 알아서들 나눠 분양보내고 거두고 하는데
지금같은 봄철이 되면 감당이 안된답니다. 새끼 낳아 조금 지나면 또 배가 불러오고~~~
지난 겨울엔 비가 쏟아지는 마당에서 새끼를 다섯마리나 나아 쫄딱 젖어있던 고양이를 옮겨줬는데 결국 한마리만 살아남았어요. 먹는 것도 시원찮아 평균 수명이 3년이라 하더라구요. 대책은 없고 안타깝기는 하고 딱하지요.ㅠ.ㅠ  
  queen314 2013/05/08 17:23
  피임약을 주면 안될까요 ?

그놈들도.....즐길건 즐겨야 하니.....
 
  merlin 2013/05/09 08:24
  아예 가족계획 강의를 할까요?
ㅎㅎㅎ  
  홍 시 2013/05/06 19:14
  길냥이 수명이 짧다네요..
캣맘들이 먹이를 주는 것에 불만이 많다는 사람을 봤어요.
밤에 애기울음 소리를 내는데, 먹이를 챙겨주니까 그시간이면 꼭 나타난다고, 시끄럽다고.
목숨이 하나인 것은 다 똑같구먼...시끄러우니까 굶기라는 건지 끄긍.
옛날에 햇볕 좋은 마루 밑에서 고무신을 핧던 고양이가 생각나네요.. 그땐 고양이는 다 편안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모든 고양이는 쥐를 잡으니까 어른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길냥이는 상상도 못했었죠.  
  merlin 2013/05/08 09:25
  저도 길냥이 밥 줄땐 뒤에 숨겨서 살살~~ 걸어가 나무 뒤에 얼른 놓고 온답니다.
나중에 그릇도 가져오구요.
여기 나타나는 녀석들 챙겨주는 사람이 많은데도 정말 2, 3년 뒤면 모습을 감춰요.
워낙 번식력이 강해 문제도 있지만 어떡해요. 눈 앞에 보이면 대책이 없으니~

햇볕 좋은 마루에서 고무신 핥는 고양이라면, 야~~ 정말 팔자 늘어진 고양이네요.ㅎㅎㅎ  
  디페쉬모드 2013/05/09 12:39
  가끔 집안이 어수선해지면 가족회의를 열곤 합니다.
"이게 너희들만의 공간이 아니잖아,어느정도 깨끗하게는 해야할것 아냐"
이러면 끙끙대고 야옹 그러면서 자기손으로 갸웃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비비꽈대요.
일루와 그려면 다 우르르 달려오지만.

이젠 가끔 보는 처지가 되었는데 좀 적막할때가 많아요.

그나저나 왜 그렇게 새끼를 버릴까요? 키우는데 그렇게 어려운것 없는데....그 귀여운 것들을 말이죠.  
  merlin 2013/05/10 08:58
  가족회의라 하시길래 본가에 가족 모두 모이시는 장면을 상상했다가~~ ㅋㅋㅋ

아마 여러마리 낳았는데 다 감당이 안 되니 그렇게 내다 놓은 게 아닌가 해요.
그래도 그렇지. 참 딱했는데 뜻밖의 도움을 받은 셈이지요.
동물을 키우다 보면 이 녀석들이 사람말을 죄 알아듣는구나 싶을 때가 많아요. 그죠?
야단치면 모르는 척~~ 가끔 보신다니 이젠 어디 맡겨두셨나봐요.
 
  디페쉬모드 2013/05/11 07:34
  그게 제가 지방일을 갈때마다 애완동물 한동안 대신 맡아 보살펴주는 곳이 있어요,근데 돈도 돈이지만 녀석들이 거기서 잘 적응을 못하고 다른 녀석들과 쌈박질도 하고 그러나 봐요,이녀석들 자기들끼리 식구라고 해서 한 녀석이 당하면 다 달려들고 그래서 연합전이 펼쳐지고...까칠하기가 좀 그렇대요.(진짜 애완동물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거기 직원분들이 힘들어 하고 그래서 J와 그 주변이들에게 분양.
잘들 지내고 볼고 싶을 때 언제든 볼수 있어서 좋아요,가끔 보면 엄청 살갑게 부비대고요^^  
  merlin 2013/05/11 16:46
  주인을 닮아서 ㅋㅋㅋ 그니까 녀석들 보고 있을 때 잘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고양이 기억력이 일주일이라 하던데 그래도 반가와하는 걸 보면 주인이 일주일 이상은 집을 비우지 않거나
주인을 닮아 기억력이 비상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ㅎㅎㅎ
요즘 동네에 꼬마 녀석이 나타나 깡총깡총 뛰어다녀요. 느닷없이 딱 마주쳤는데 꼼짝않고 가만 쳐다보니 녀석도 얼음땡!으로 쳐다보다 힘든 지 엉덩이만 바닥에 내려놓고 계속 쳐다보길래 속으로 우스워 혼났답니다.
그렇게들 살아남네요.  
  바다와섬 2013/05/20 19:22
  우와... 믿기 힘든 실화!!
멀린님이 아니었으면 안믿었을거에요. 정말 멋진 어미 길냥이네요!! 건강하고 많은 자식들과 행복하게 살기를...  
  merlin 2013/05/21 20:48
  그죠 그죠!
저도 몇번이나 진짜루요? 정말 그 녀석이 그랬어요? 하고 수위아저씨께 여쭤봤답니다.
그렇게 결말이 안 났으면 참 힘들었을 것 같은데~~
참 신통방통하지요? 정말 의젓해 종종 맛있는 식사 제공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