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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종석 칼럼> 4월 9일

merlyn 2012. 4. 9. 21:28




[고종석 칼럼]    4월9일

 

이름을 불러보자. 삼가는 마음으로. 우리가 민주공화국 시민이라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다.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


 지금부터 꼭 37년 전인 1975년 4월9일 새벽, 이 여덟 사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들은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인혁당 사건)의 주모자로 낙인찍혔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어기고 형법의 내란예비음모죄와 내란선동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그 전해 기소된 이들에게 비상고등군법회의는 사형을 선고했고(민간인이 군사재판을 받던 시절이다!), 이듬해 4월8일 대법원은 이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러니까 대법원이 확정판결을 내린 지 하루도 안 돼 이들은 차가운 시신이 되었다.

 

이들은 북한의 간첩이었던가? 아니었다. 이들은 내란을 꾀했던가? 그러지 않았다. 이들은 공산주의자였던가? 알 수 없다. 한 사람이 제 내면에 어떤 신념을 지녔는지를 하느님이 아니면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적어도 이들은 공개석상에서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라고 인정한 바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탈장까지 될 정도의 무지막지한 고문(당시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하재완의 옆방에 수감됐던 시인 김지하의 증언)을 통해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내란음모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에겐 고문을 해도 되고, 공산주의자들은 다 죽여야 할까?)

 

젊은 세대에겐 생소할지도 모르는 이 인혁당 사건은, 당시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힘을 얻자 학생운동권의 소위 민청학련을 영남지역 사회운동권과 얽어 반정부운동 일체를 일소하려던 박정희 정권의 사법적 살해 계책으로 해석된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 법학자 회의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가 기지개를 켜던 1989년 <4월9일>이라는 연극의 소재가 되었고, 2000년에는 김태일 감독의 손을 거쳐 <4월9일>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잔혹한 고문과 서둘러 집행된 사형 말고도 조작의 낌새는 사건 당시 이미 또렷했다. 주검 대부분이 가족의 동의 없이 곧바로 화장됐고, 이에 항의하던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 등 외국인 선교사들이 나라 바깥으로 쫓겨났다. 요컨대 1975년 오늘은 박정희 유신체제가 그 광기를 섬뜩하게 드러낸 날 가운데 하나다.

 

총선을 바로 앞두고 인혁당 사건을 거론하는 것이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에 대한 공격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지금 낡아빠진 연좌제의 깃발을 흔들어대고 있지 않다. 인혁당 사건을 조작한 것은 박정희지 박근혜 위원장이 아니다. 물론 2007년 사법부가 이 사건을 재심한 끝에 여덟 사람 모두에게 내린 무죄판결을 박 위원장이 자신에 대한 ‘정치공세’에 불과하다고 일축한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박 위원장이 박정희를 제 정치자산으로 삼아온 만큼 더욱더 그렇다. 여북하면 김영삼 정권 시절 청와대 교문수석을 지낸 김정남씨가 박 위원장의 이 냉혹함을 보고 ‘인간에 대한 절망’을 느낀다고 극언했을까.

 

그러나 박 위원장의 태도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낸, 나이 든 유권자들의 태도다. 실상 유권자들이 그 사건에 분노하고 있다면, 박 위원장이 저리 배짱 좋게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박정희와 박 위원장의 공범이다. 우리도 겪었을 수 있었을 저 끔찍한 인권유린에 대해 우리는 입 다물고 있다. 왜? 당한 것이 ‘우리’가 아니라 우연히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을 포함한 박정희 정권 시절의 인권 피해자들을 우리가 ‘그들’로 여기는 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앞날은 어둡다. 결국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윤리적 심문거리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 대한 윤리적 심문거리이기도 한 셈이다. 나와 가족만 안 당한다면 우리 이웃 누군가가 어떤 험한 꼴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은 우리를 인간에 미달하는 존재로 만들 뿐 아니라, 대한민국 공동체의 통합을 크게 해칠 것이다. 잊지 말자, 저 여덟 사람을. 오늘은 4월9일이다.

고종석 언론인


 

 

서울 구치소가 의왕시로 이전하고 난 후 그곳은 서울구치소 공원이라고 이름 바꿔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라고 바뀐 건 그 후로 10 여년이 지나서다)
이 무렵 그 곳을 소개하는 글을 쓰게 되어 늦가을 오후 거기 한적한 마당을 걷게 되었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때라 사람도 없었고 새떼만이 우르르 날라다녔는데
여기저기 건물마다 붙어있는 설명을 읽으면서 메모하고 사진찍고 돌다가 마지막 닿은 곳이 사형장이었다.
해가 질 무렵이 된 참이라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는데 내부를 공개하지도 않은 사형장 건물 앞에 선 것 만으로도 머리가 쭈뼛거렸다.
그때까지 본 모든 건물의 안내판엔 한결같이 "지독했던 일본 경찰이 우리의 독립투사를 고문하고 형편없는 감방에 가두어 심하게 다루고 손바닥만한 징벌방에 가둬 꼼짝 못하게 하고~~" 식으로 온통 일제치하에서의 만행만이 나열되어 있었다.
같은 곳에서 우리 정권이 우리 나라 사람을 일본 경찰 못지않게 혹은 더 독하게 다루었다는 얘긴 어디에도 없었다.
사형장 앞에도 마찬가지.
독립투사 누구누구가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는 문구는 절절히 있었지만 인혁당 사건 피해자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앞서 본 고문기구며 인형이 옹색하게 몸을 쪼그러 뜨리고 앉아있던 아주 좁은 징벌방이며 독립투사들이 추위와 더위에 시달렸다고 설명이 달려있던 감방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그 길을 따라 죽음의 장소로 걸어갔을 그 분들의 마음을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이 역사관이 새로 꾸며져 많이 바뀌었다 하는데 과연 역사를 얼마나 정직하게 써두었을 지 궁금하다. 


황새울 2012/04/10 02:32
  십여년전 쯤에 서울에 잠깐 살았었죠. 그때 후배랑 지인이랑 술마시다고 2차를 향해서 함께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에게 독립문으로 가죠라고 말했었죠. 택시기사왈 독립문은 왜 가냐고 라고 묻기에 독립문이 보고 싶어서라고 얘기했었던 자락이 있네요. 그 독립문 뒤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었죠. 독립문도 웃긴 얘기지만 서대문형무소도 웃기더군요. 역사가 덧칠되어져 진실의 역사가 아닌 매국과 돈질의 역사가 되어버리면서 인간이 설 자리가 점점이 줄어드는게 안타까울뿐. 바꾸지 못하면 덧칠되어진 역사에 따라 흘러가는 인간 아닌 인형이 된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네요.
merlin 2012/04/10 09:38
  요즘처럼 역사의 중요성이 실감나는 때도 없습니다.
해방 후 그저 틀어지기만 한 현대사가 개념정립이라는 게 없이 민주주의를 다 망가뜨린 것 같습니다.
남은 건 돈 밖에 없지요. 더 속이 상한 건 그 돈이라는 게 절대 내 손에 들어올 수가 없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진실은 나 몰라라 하고 쫓아 다닙니다. 희망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하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