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웃게 만드는 말?

merlyn 2009. 10. 5. 22:42


부암동 백사실 계곡에 갔다왔다.
아버지가 아프시기 전엔 주말이면 남편과 둘이서 서울 이곳 저곳을 그냥 잘 돌아다녔다.
무작정 집을 나서 아무 버스나 타고 -가능하면 우리가 잘 모르는 곳으로 가는- 아무 곳에서나 내려 그 근방을 마구 돌아다니는 것이다. 불광동 언저리, 약수동, 종로구 일대, 장충동 등등.
 
2 주 전쯤 나 혼자 백사실 계곡에 두 번이나 가보고 좋아  남편을 꼬드겨 아주 오랜만에 길을 나섰다. 광화문에서 몇 정거장 가지 않아 부암동에 내려 북악산 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금방 숲이 한가득 우거진 산속에 들어서게 된다. 참 좋다. 정말 좋다.
 
서울은 이래서 좋다. 시내에서 지척인 곳에 이렇듯 우거진 숲이 있고 담장 하나 너머로 조용하고 고즈녁한 궁궐이 있다. (대학다닐 때 휴일이면 궁궐에 자주 가곤했는데 서울토박이 친구들이 촌스럽다고 놀리곤 했다. 니들은 언제 가봤냐 물으니 초등학교, 중학교 때 너무 많이 가서 이젠 안 간다고~~ 뭐든 억지로 하게 되면 이런 부작용을 낳는다)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내려 북악산 산책로를 따라 한참 걸어 올라가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까지 가서 다시 백사실계곡쪽으로 내려와 세검정 앞으로 하산. 두시간이 조금 더 걸렸는데 운동하기 딱 좋았다.
그런데 주말에 백사실계곡에 가자고 얘기할 떄부터 남편이 자꾸 웃었다.
난 그냥 백사실이라는 이름이 우스워 그런가보다 했는데
산에 가서도 내가 백사실계곡이라는 말만 하면 키들키들 웃느라 정신을 못차려
그 단어가 웃기냐고 물었더니 말 자체는 안 웃기는데 내가 그 말을 하면 너무 웃긴다는 거다.
"내가 백사실계곡하면 웃긴다고?"
"ㅋㅋㅋㅋㅋ"
그게 왜? 자기도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냥 내가 그 말을 하면 무지 웃긴단다.
시험삼아 산길을 따라가며 백사실계곡 백사실계곡 하니 그때마다 웃느라 정신을 못차린다.
내~~ 참!
 
"당신 잘 걸렸다. 이제 삐돌이의 시대가 종말을 맞았네~"
"왜?"
"앞으로 싸우고 삐지기만 하면 내가 백사실계곡! 할테니까"
"ㅋㅋㅋㅋㅋ"
 
20 여년 전 쯤에 알았으면 좋았을 걸.
남자가 삐진다는 걸 전혀 모르다가 조금만 서운한 일이 생기면
번번히 삐지고 말 안하는 남편 땜에 속상해했던 그때
이 이름을 알았더라면 ~~~~
하지만 이젠 그닥 큰 효과는 없을 꺼다.
삐지는 것도 초조해하는 상대가 있어야 효과가 있지 눈도 깜빡 안하는 중년의 아내 앞에서
죙일 삐져본 들 무슨 재미가 있으랴.
 
근데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백사실계곡 하면 뭐가 그리 웃긴다는 거야?  
 
 



호주돌팔이 2009/10/06 08:34
  남자들은 그렇게 싸우거나 고민거리가 있으면 동굴에 들어가 버린다고 어느 신부님이 강론하신걸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냥 놔두면 나오고, 자꾸 쑤셔대면 더 깊이 들어간답니다.
이거, 또 비밀을 털어놓고, 냉담자 주제에 또 성당얘기 했네요... 그래도 출처는 밝혀야 되겠죠?
merlin 2009/10/06 13:13
  예, 저도 동굴이야긴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삼겹살 먹자할 때 돼지갈비는 어때? 했다고 삐지고
안 먹겠다고 해놓고는 나 혼자 먹으면 자기 좀 안준다고 삐지고
예정보다 일찍 들어와서는 나 집 비웠다고 삐지고~~

동굴에 들어갈 꺼리도 안되는 걸로 하도 들락거리니
동굴이 너무 지겨워 싸 짊어지고 도망갔나봐요. 이젠 잘 안 삐지네요.
들어갈 곳이 없어서.

근데 신부님들은 결혼도 안 해보셨으면서 결혼상담을 참 잘해주세요.
호주돌팔이 2009/10/06 15:06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아는건 아니고,
남자면서 산부인과 의사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근데 여기 남편 성토장이 됐습니다....
제 마누란 절대 못 보게 할랍니다.
merlin 2009/10/06 19:41
  요깟 일로 두려워하시는 걸 보니 호돌이님도?

이 글 안보셔도 부인께선 이미 다 앱~~니다.
대갈마왕 2009/10/06 10:13
  백사실계곡이라... 아무리 읊어봐도 웃음포인트가 안나오는데... 남편분의 허벅지를 좀 더 긁으셔서 무너가 있는지 캐내보세요. 추억의 불량식품같은 먼가가 있을지도..
저도 엄청 삐돌이인데요... 안그런척 되게 잘합니다. 왜냐..그냥 술을 먹고 헤벨레~ 하다보니... ㅎㅎ
부부가 같이 산책나가는 모습. 너무나 부럽고 좋아요. 울 마눌님은 가자해도 안가고.. 스무번 얘기하면 한 번 갈까..합니다. 나 삐친다..
merlin 2009/10/06 13:20
  그래서 물었지요.
"옛날 애인 성이 백이요, 이름은 사실이었어?"
"ㅋㅋㅋㅋㅋ"

제 남편이 놀러다니는 걸 무지 싫어한답니다. 운전하는 것두요.
휴가를 언제 갔었나 기억도 안나요. 가끔 출장갈 때 따라가 혼자 노는 거나 하지요.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보니 마누라 눈치도 보이고 해서 선택한 것이 이른바 서울투어랍니다. 멀리 여행갈 필요없고 차도 필요없고.
그러는 사이 재미들려서 둘이 잘 걸어다녔지요.
다음 주엔 성곽길 걸어보려구요.

마왕님이 아무리 아닌 척 해도 정선생님은 다 알고 계실껄요?
어이구 우리 신랑 또 삐지고는 아닌 척 하네, 귀여워 ㅋㅋ~~ 이렇게.
나리타산 2009/10/06 11:39
 
저두...백사실 계곡에 왜 웃으시는지 모르겠지만...
이유가 너무 궁금합니다요...ㅎ

마자요... 남자도 삐진다는 사실에 올매나 경악스러워하던
신혼시절이었는지 몰라요...엉엉...
그래서 제가 부쳐준 울 냄푠의 별명은...

'삐낀돌이'랍니다...ㅋ
merlin 2009/10/06 13:27
  그쵸! 그쵸!
전 잘 삐지는 애들 상대하는거 골 아파 그런 애들하고는 말도 안 섞었는데.
결혼하니 그저 뭔 일만 있으면 입 꼭 다물고 눈 내리깔고 ~ ㅋㅋ

삐식이, 삐돌이가 남편 별명인데 삐낀돌이 씨도 계셨네요.
막상막하일듯.ㅎㅎ

자기도 도대체 모르겠다네요.
백사실계곡이 왜 그렇게 웃긴지.
하여간 내가 그 말만 하면 그냥 킥킥댄답니다.
나이들면서 나사가 하나씩 빠져나가고 있는 건지.

megumi 2009/10/06 22:18
  아.. 난 잘 삐치는 사람들은 영~ 피곤해서.. ㅋㅋ
(제가 왠만해서 잘 안 삐치거든요 ㅎㅎ)

제가 아는 일본 친구는..
'배꼽' 이라는 발음이 귀엽대요 그래서 배꼽이라 그러면 실실 웃어요
근데
'눈꼽' 은 싫대요 -_-
merlin 2009/10/07 10:05
  삐침의 여왕인 울 엄마도 "넌 참 성격도 좋다" 하고 손들었는데
결혼하니 신랑까지 삐침대왕! 으~~윽 힘들었지요.

배꼽? 새삼스레 읽어보니 좀 웃기긴 하다~~ ㅎㅎ
콜로라도 2009/10/06 22:39
  저는 결혼 한 지가 33년 되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바깥 분이 별 대수롭 지 않은 것에도 삐진 다는 것은 그와 똑같은 아니 더 한 개같은 일들을 밖에서 매일 접한다는 것 일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생존의 한 방법인 스트레스를 없애는 방법에는 당한 그대로 내뱉어 보이는 방법도 한가지 방법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경험담을 소개 한다면,
일하던 회사에 한 수퍼바이저가 있었는 데 한번은 점심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자기의 임무 중의 중요한 한 부분은 일하는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들어 주는 것 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불평불만이란 때로는 밖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로 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merlin 2009/10/07 10:22
  충분히 공감가는 말씀입니다. 유난히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이라서요. 그러고보면 요즘 잘 안삐지는 이유 중 하나가 이제는 바깥에서 생긴 일을 집에 와 그대로 얘기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겠네요. 힘든 걸 잘 풀 수 있는 방법을 잘 찾는 게 중요하겠습니다.

가끔씩은 나도 마누라 같은 상대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이 떄문일까요?ㅋㅋ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는 성격이긴 하지만 저 역시 생존욕구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떄가 있어서요.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linen 2009/10/07 06:16
  삐지는 남자도 별루고 말 많고 징징대는 남자도 별룬데...
살다보니 익숙해졌는지 그냥 그래 그럼서 사는거 같아요.^^
merlin 2009/10/07 10:40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 "세월이 약이야~~"하는 건데
맞는 말이구나 실감할 때가 꽤 있어요.ㅋㅋ

그러다 때로는 그래~~ 당신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지 하고 봐주기도 하고.^^
주디 2009/10/07 08:30
  전 자랄때 엄마에게 맨날 삐지는 아버지보다가,
결혼해서 삐지는 일도 화내는 일도 거의 없는 남편보니깐 엄청 신기하더라구요.^^
merlin 2009/10/07 10:34
  헉! 이런 행운이~~
전 거꾸로 삐지는 엄마와 풀어주려 애쓰는 아버지 밑에서 컸어요.
안 삐지는 아내와 사니
얼마나 좋아할 까 했다가 완전히 거꾸로 당했다는 ㅠ.ㅠ